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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성곽길 서울 품어안은 역사의 저장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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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호 06면

북악산 곡장에서 산 정상인 북악마루로 길게 이어지는 성곽의 모습. 한양도성 전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창의문에서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구간은 한양도성에서 성곽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사진 서울시]

낙산에 오르기 전 혜화문은 꼭 둘러봐야 한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다. 1928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지만 94년 지금 자리에 복원됐다. 원형은 크게 훼손됐다. 원래 위치는 이미 도로가 점거하고 있어 궁여지책으로 오른쪽 언덕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애통한 일이지만 당시의 흔적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혜화문을 따라 올라가면 서울시장공관이 나온다. 이어지고 끊긴 성곽에선 이처럼 한양의 길과 경성의 길, 서울의 길이 모두 만난다.

한문학자 심경호의 한양도성 이야기

혜화문은 원래 홍화문이라 했는데 중종 때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의 문 가운데 혜화라고 한 게 있어서 그걸 피해 홍화라고 고친 것이다. 같은 이름이 이미 사용된 것도 모르고 문의 이름을 정했단 말인가. 글자로 우주와 세계를 그린 우리 선인들이 그렇게 무신경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기이하다. 그 사연 속에 숨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혜화문과 홍화문 사이의 비밀. 성문의 이름 하나로 우리는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일의 수도 베이징·도쿄와 비교한다면, 서울의 산이 얼마나 큰 자산인가 하는 것을 금방 수긍할 것이다. 두 해 전 도쿄의 서쪽 외곽에 있는 다카오(高尾)산에 올라보고는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서울의 산들이 팔짱을 끼고 둘러서 있는 모습이 몹시 그리웠다. 서울 성곽은 그 내산에 가만히 앉아 넉넉한 품새로 서울의 옛 도성 안과 성저(城底) 십리를 바라보아 왔다.

조선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에서 우리 서울을 두고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 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여 있다”며 “산들이 성 밖을 둘러싸매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 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감탄했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 빛이 모두 약간 붉은 색을 띠면서 희게 반짝여서, 바라보면 흰 눈이 깔린 듯하다고도 했다. 한양도성을 걸어 보면 동월의 예찬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한양도성은 문명과 자연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조선 초 도시계획을 세울 때 서울은 주례 ‘고공기’에 나오는 좌묘우사의 원리대로 궁궐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고, 도심을 격자형으로 했다. 하지만 지형을 중시했지 좌우 대칭을 맞추려 하지는 않았다. 관자는 이렇게 말했다. “산이나 강 같은 천연자원을 잘 활용하고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해 서울을 만들면, 결국 성곽을 쌓을 때도 규격대로 하지 않아도 되고, 도로를 만들 때도 표준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조선 왕조가 도성의 사방에 산성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두른 것은 그런 진취적 사유의 결실이다.

한양 내사산의 지세를 이용해 태조 5년(1396)에 돌로 쌓은 성이 지금 성곽의 원형일 것이다. 세종 4년(1422)에 개축했을 땐 주위가 1만4935보였다고 한다. 현재 도성의 성벽엔 세종 때의 모습과 숙종 이후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는 구간도 많다. 태조 땐 북악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성곽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어 ‘천자문’ 의 순서대로 자호(字號)를 정하고, 지방 백성들을 동원해 한 구간씩 성곽을 개축하게 했다고 한다. 남포(보령), 영동, 동복, 함열…. 전국 각지의 여러 지명이 성곽의 돌에 새겨져 있다. 필획이 확실치 않은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읽어 본다. 장정들은 농한기, 즉 혹한의 겨울에 동원됐을 터다. 돌을 떠서 성벽을 세우거나 개축하느라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랴. 그래도 마음씨 좋은 패장의 지휘 아래 일을 잘 마쳤으리라 믿어 본다.

이화여대부속병원 있던 자리에서 낙산의 성벽은 끝이 난다. 갑작스레 차량과 사람들이 오가는 구역으로 들어가 어지러웠다. 불과 몇 백m 상관에 이렇게 다른 세계가 있다. 아쉽다. 내친김에 동대문의 문루를 둘러보기로 했다. 문루 2층은 마루 판자들이 뒤틀려 있어 위태위태하게 느껴졌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서쪽으로 향한 창을 열자 종로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한말이나 일제 때의 사진도 이곳에서 구도를 잡았을 것이다. 중학교 때 토요일이면 전차를 타고 동대문 옆을 지나던 생각이 난다. 비원 옆 학교에서 종로 2가까지 걸어와서 초록색 전차에 올라 운전석 옆 자리를 차지하고는, 동대문을 지날 때마다 흥에 겨워 가곡을 흥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당시에 동대문은 전찻길의 진동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지금 동대문은 정문 아치의 바위 틈이 조금 벌어져 있다. 바로 아래에 지하철 1호선이 통과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틈새는 더 커질지 모른다.

정조대왕은 “성곽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아름다운 기구이며 적을 방어하는 훌륭한 도구”라고 했다. 성곽이 바깥을 차단해 외부 침입을 막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산과 구릉을 따라 이어진 성곽은 도성의 공간을 장식하고 그 역사적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기능도 했다. 그뿐인가. 국가 직영의 화원과 사대부, 중인층의 화원을 넓게 끌어안아 도성의 생태 공간을 부각시켜 왔다. 그렇기에 선인들은 성곽을 따라 거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성의 웅장함을 노래했을 것이다. 18세기 말 이가환은 옥계청유권서(玉溪淸遊卷序)에서 도성의 각 구역마다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문화적 풍습이 있는지 자세히 언급했다. 북쪽의 백악산과 남쪽의 목멱산(남산) 사이로 개천(청계천)이 흐르고 운종가(종로)에 가게가 늘어서 있는 광경을 원경으로 잡았으며, 경복궁 남쪽의 육조 거리와 경복궁 서쪽의 좁은 땅, 도성의 동남쪽 저습지, 동북쪽의 반계(泮溪)에 하나하나 시선을 주었다. 성벽을 따라 거닐면서 근경과 원경을 감상할 수 있었기에 그러한 글을 쓸 수가 있었다.

서울의 도성 안과 성곽 밖 성저십리는 우리 역사의 소중한 저장고다. 서울의 성곽은 정도(定都) 600년을 계기로 새로 조명되었다. 2015년까지 서울시는 한양도성 복원을 마친다고 한다. 맑게 갠 하늘 아래 성곽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거나,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성벽을 타고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이, 우리 모두의 지극한 기쁨이 될 것이다.

12월 대선에 출마한 여야 주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한양도성에 올라 우리 역사의 간단없는 흐름을 되새겨보길. 그리고 600년 역사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심경호(56)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교토대 문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김시습 평전 산문기행: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국왕의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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