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르네상스' 꽃피운 부부 화가

중앙일보

입력

신간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는 '거울' 이다.

근현대 멕시코의 르네상스를 일궈낸 위대한 부부 화가의 삶을 담은 드라마틱한 평전(評傳) 이면서도, 책 읽는 내내 제3세계 한국과 한국문화까지 되비춰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제1세계 보다 더 제1세계적인' 한국의 기형적 풍토를 되새겨보는 계기도 제공한다. 제1세계 위주로 입맛이 길들여진 책읽기의 편식을 고쳐주는 '수입 다변화(多變化) 의 텍스트' 라는 판단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음미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할 듯싶다. 남미 문학의 거장 가브리엘 마르케스 작품처럼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몽환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세계를 떠올리며 책장을 열어야 한다. 지금까지 읽어온 반 고흐.피카소 등 서구 미술가들의 '파리한 모더니즘 세계' 와 또 다르게, 피가 펄펄 끓는 민중적 정서 말이다.

사실 책의 두 주인공 멕시코 부부는 서구 모더니즘과 선명한 결별을 감행했던 모험가였다. 토착문화에 뿌리 박은 예술행위에 대한 헌신과 함께 위대한 성취를 보여줬던 전사(戰士) 였다.

멕시코 벽화운동 - 한국의 1980년대 민중미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 의 창시자 리베라의 경우를 보자. 그는 1차대전 직후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피카소 등과 어울렸지만, 큐비즘과의 결별 뒤 독자적인 미술운동에 들어간다.

그의 부인 칼로의 경우는 한 술 더 뜬다. 앙드레 부르통 같은 초현실주의자 등의 간곡한 초청으로 유럽에 갔던 칼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리를 '한물간 도시' 라고 코웃음쳤다.

20세기 초 서구에 대해 자신있게 "노" 라고 말한 제3세계의 여성 지식인은 요즘들어 더욱 높이 평가되는 대지의 모성(母性) 이 깃들인 페미니즘 미술의 모델을 만들어 냈다. 저자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멕시코 원주민에 대한 찬양과 혁명에 대한 신념으로 맺어진 부부 화가에게는 신비한 무언가가 있다. 돈의 위력과 제국주의자들의 위협에 이처럼 강렬한 열정으로 맞선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대중예술과 원주민의 부활,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과 환상이 아즈텍 문명의 후광을 가진 멕시코에서 태동했다. 디에고와 칼로의 사랑 이야기는 오늘도 생생히 살아 있다. " (19쪽)

신간은 이렇듯 멕시코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바꿔준다. '사막과 솜브레로(차양 넓은 모자) 의 나라' '미국의 뒷마당' 으로 알아온 이 나라가 스페인 식민시대 이후 민족주의 혁명(1910~17) 과정을 통해 얼마나 역동적이고 선구적인 역사를 가꿔왔는가 하는 점, 그에 비해 우리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다는 자각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멕시코는 유럽의 지성들이 부러워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클레지오도 '서구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안(代案) 의 문명' 을 멕시코에서 발견했고, 그 상징인 칼로와 리베라 부부에게 거듭 경복(敬服) 을 한다.

클레지오의 서술에 따르면 혁명 직후 멕시코시티는 '모험가와 혁명가들의 풍요로운 대중도시' 로 일변했다. 20년대 이후 20여년 가깝게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이들이 칼로와 리베라다.

유 럽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디에고 리베라(1886~1957) 는 이 문화운동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민중의 삶과 아즈텍 문명에 눈을 떴고, 이것을 형상화한 장대한 벽화운동을 시작한 것도 이때다. 교육부 청사.대통령궁의 벽화는 그의 손으로 제작됐다.

21세 연하인 프리다 칼로(1907~54) 는 리베라에게 반해 그에게 접근하기 위한 통로로 그림을 선택했고, 두번 결혼에 네명의 아이를 가진 바람둥이 유부남 리베라 - 에너지 면에서 멕시코 출신 영화배우 앤서니 퀸을 연상시킨다 - 와의 결합을 선택했다.

칼로는 '보기 드문 품위와 확신에 찬 소녀' 이자 영적(靈的) 매력을 가진 여사제로 묘사된다. 하지만 칼로는 소아마비에 석녀(石女) 라는, 여성이 가지는 최대의 고통을 품고 있었다.

책을 보면 운명적인 만남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싶다. 저자는 이 부부를 '현대 세계사의 전대미문의 부부' (96쪽) 라고 규정한다. 예술분야에 남긴 이 부부의 생산성이 그렇고, 역사와 얽히는 삶의 드라마도 그렇다. 본래 인디언 혼혈인 리베라는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발산하는 동물적 매력과 에너지로 주변에 여성과 정치인들이 들끓게 했다. 이 부부는 그러면 '로컬 아티스트' 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멕시코 혁명이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주었듯이 멕시코의 스타 부부는 30년대 러시아를 방문해 스탈린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고, 멕시코로 망명온 트로츠키와도 교유했다.

트로츠키와 칼로 사이의 스캔들로 부부가 이혼한 일화도 책에 나온다. 결국 트로츠키가 암살되면서 둘은 재결합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 부부의 삶과 멕시코 역사는 실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조금은 알려져왔다.

이를테면 신영복(성공회대) 교수가 에세이 『더불어 숲』(중앙 M&B, 1998) 을 통해 벽화운동의 힘과 제3세계의 리더 멕시코 문화를 찬양했다. 또 칼로의 삶을 그린 책으로 『나는 내 그림 속에 있다』(창해, 1997) 가 선보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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