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가뭄의 가면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비 소식이 곧 있겠다고 한다.

비만큼 흡족하지야 않지만 온 국민이 동참한 가뭄 극복 성금도 1백억원 넘게 모였다. 사단법인 전국재해대책협의회는 50억원씩 두 차례에 걸쳐 1백억원을 농림부에 전했다.

▶ 양수기보다 揚水策 급해

사람들이 애를 쓰고 자연이 비를 내려주면 혹독했던 가뭄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가뭄은 잊혀지더라도, 이번 가뭄에 그 '바닥' 을 다시 한번 드러냈던 우리 사회의 척박함 두 가지는 또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우리 사회의 물 관리와 성금 풍토다.

우리의 척박한 물 관리를 잘 나타내는 소품이 사실 양수기다.

애타는 마음들로 성금을 모았지만 지금 같은 물 관리 체제에서는 당장 양수기 말고 달리 쓸 용처도 별로 없다.

양수기라도 더 있으면 그나마 도움이 되겠으나 "양수기가 아니라 물이 없다" 는 소리가 농촌에서부터 나왔던 터다.

더구나 양수기 재고는 이미 거의 바닥나 있다. 그래서 각 시.도가 당장 원하는 약 9천대의 양수기 중 8천대 이상은 이달 말이 지나야 전달된다는 것이 농림부의 설명이다.

하기야 비 온 뒤에 전달된 양수기라 하더라도 보관해 두면 쓸 곳은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수해 때 수재의연금을 모았더니 한 농가에는 그해 겨울 난데없이 생수 한 박스가 전달되더라는 것처럼, 이번 양수기들도 '국민성금기증' 표지를 달고 뒤늦게 전달돼 각 시.도의 보관 창고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예산 짜듯 성금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인 성금은 다 쓴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번 성금을 정부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물 관리를 위한 '종잣돈' 으로 삼으면 훨씬 좋지 않을까.

'비 온 뒤의 양수기' 를 사는 데 물 흘려 보내듯 쓰지 말고, 댐에 물을 담아 두듯 국민 성금의 '뜻' 을 받아 정부 재정을 물 관리를 위해 제대로 배분하는 계기로 삼자는 이야기다.

가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2006년부터 물이 부족한 나라가 되고 2020년에는 농업용수.생활용수.공업용수 할 것 없이 한해 동안 모두 약 26억t의 물이 모자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다(중앙일보 6월 16일자 27면 참조).

2011년까지 12곳에 댐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자료를 가뭄 와중에 '때 맞춰' 내놓은 것을 보면 정부가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댐은 건교부, 관정이나 양수기는 농림부, 예산은 기획예산처, 지하수 수질 관리는 환경부 하는 식으로 해서는 종합적인 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가 없다.

양수기는 언젠가 녹이 슬 것이고 관정은 지금도 여러 곳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한편으론 댐을 건설한다면서 생활 하수는 여전히 흘려보내고 있다. 쓴 물을 하수도로 흘려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쓰는 파리 시의 중수도(中水道)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생활 하수를 정화해 재활용하는 하수도 정책도 제대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뭄 때 우리 물 관리 수준의 '바닥' 을 드러내는 소품으로 양수기가 되풀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금 풍토도 이번에 다시 '바닥' 을 보여주었다.

'최차혜 병원 참사랑 봉사단 34만2천1백88원' (중앙일보 6월 16일자 2면 성금 접수 명단)

이런 것이 진짜 성금이다.

▶ '대통령 성금' 이제 사양을

그러나 이제 '김대중 대통령 금일봉' 하는 식의 성금은 우리 모두가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할 때가 됐다. 우리 풍토에서 대통령이 앞장 서 성금을 냈다는 것은 각 기관.기업에 '준조세' 를 내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또 성금이 과연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도 따져볼 때가 됐다.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면 모르되 기관.기업 돈을 장(長)의 이름으로 냈다면 졸지에 '준 공금유용' 이 된다.

이런 풍토를 고치려면 성금 접수 창구를 신문협회 등 한곳으로 해야 한다. 중앙일보가 처음부터 신문협회와 함께 접수에 나선 것이 바로 그래서였다.

비가 내리면 이런 저런 '바닥' 이 다 안보이겠지만, 지금이 저수지.하천 바닥을 준설하고 쓰레기를 치울 적기라는 지적처럼 이번 기회에 물 관리와 성금 풍토의 '바닥' 을 제대로 보자.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sg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