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말, 그 대중설득의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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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 학문으로 치면 이른바 '수정주의 사관' 의 세례를 받은 후예들의 북한보기에는 앞서가는 면이 있었다.

냉전 극복이라는 시대적 몸부림이 세월이 흘러 학문에도 투영된 때문일까. 젊은 시절 거친 투쟁의 생경함을 딛고 이제는 균형된 시각으로 북한을 보려는 노력이 차츰 결실을 맺고 있다.

저자는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세대며, 청소년기 냉전 이데올로기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저자가 결혼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자녀로부터 "북한은 좋은 나라야, 나쁜 나라야"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이 책을 쓴 동기 중의 하나란다.

동기야 어쨌든 여전히 이 시대 이해의 핵심 중 하나인 북한보기를 위해 저자는 김일성의 '말' 이라는 새로운 창을 만들었다.

이 책은 지난해 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을 기초로 김일성의 '말의 정치' 를 분석하고 있다.

"지배란 강제의 문제라기보다는 동의의 문제다. " 이 말은 이 책이 북한의 김일성 장기독재 체제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 삼아 물고 늘어진 화두다.

지금까지의 북한 연구의 큰 흐름은 김일성 체제의 유지 과정을 숙청과 감시.위협 등 강제적 요인을 중심으로 설명해 왔는데, 이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기존의 연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인 '말의 정치' 에 무게를 실었다.

한마디로 아무리 철권통치가 무섭다 해도, 설득이 담보되지 않은 통치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이며 김일성 장기집권의 핵심은 말의 정치였다는 얘기다.

일찍이 레닌이 역설했던 선전선동 이론을 상기시키는 이 전략은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국민적 학습을 통해 김일성의 담화가 인민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경로를 제도화하는 한편, 저작(著作) 의 지속적인 개작과 수정을 통해 '김일성의 말을 '법이요, 진리' 인 무오류(無誤謬) 의 절대화 단계' 까지 끌어올렸다.

그 표현 양식의 하나로 저자는 '수령의 문풍(文風) ' 을 소개했다. 김일성 담화의 금과옥조 중 하나인 '노동자.농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대중이 요구하는 글' 을 언어사용의 본보기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이런 문풍을 그대로 적용해서 체계화한 것이 주체철학이요, 사상이란 것이다.

사실 북한을 보는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운 지금,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접근은 맹목적인 적대감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지향하는 객관적 인식은 분명 북한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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