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 주는 남과 여 '북텔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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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텔러' 를 아시나요. 말 그대로 '책 읽어주는 사람' 이다.

하지만 프랑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 나 독일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정도를 떠올리고 만다면, "역시 구세대" ! 요즘 '듣는 책' 인 오디오북이 테이프나 CD.MP3 파일 등 형태는 물론, 시집.경영서.요리책 등 내용까지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북텔러는 '녹음하기 위해 책을 읽는 낭독자' 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레이터' . '스토리텔러' 등으로도 불린다.

북 텔러는 대개 책의 저자나 성우, 배우들이다. 미국에선 거물 정치인이나 할리우드 스타들도 많이 참여한다.

힐러리 클린턴 전 대통령 부인이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직접 녹음해 1996년 그래미상 비음악 앨범 일반부문(Spoken word) 수상자로 선정됐는가 하면, 지난해 이 부문 후보작이었던 셰익스피어 소네트 전집은 캐더린 터너, 패트릭 스튜어트, 알 파치노 등 쟁쟁한 스타들이 녹음한 것이어서 화제였다.

◇ "북텔러가 되고 싶어요"

연극배우로선 아직 무명이나 다름없는 김자연(27.여) 씨는 지난해 말 녹음한 『가시고기』로 '얼굴없는 스타' 가 됐다.

조창인씨의 밀리언셀러 소설을 축약해 2개의 테이프에 담은 이 오디오북에서 그는 백혈병에 걸린 아들 역을 맡았다.

이에 대해 "진짜 어린 아이 목소리냐?"
"아들 역을 맡은 성우가 누구냐?" 는 문의 전화가 잇따랐던 것.

덕분에 시 낭송 오디오북도 녹음해달라는 제의를 받아 얼마 전에 작업을 마쳤다.

국내 오디오북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이렇게 '북텔러 스타' 를 꿈꾸는 이들도 늘고 있다. 오디오북 전문업체들에는 지망생들의 편지나 e메일, 문의 전화가 하루 평균 2~3통씩 이어진다.

"대학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의 주부입니다. 동봉한 테이프를 한번 들어봐 주세요. "

"점자도서관에서 책을 읽어 녹음하는 자원봉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목소리' 는 보장합니다. "

" '준비된 21세기 성우 지망생' 에게 불타는 잠재력과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시렵니까?"

서울 은평구에 산다는 70대 할머니가 "매일 남편에게 신문이나 책을 읽어주는 게 취미" 라며 북텔러가 되는 방법을 물어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천의 목소리를 찾아라

업체들의 입장에서 가장 '안정성 있는' 북텔러는 저자다. 1만 부 이상 팔린 정찬용씨의 오디오북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경우 '저자가 직접 강의한 실용서' 라는 점이 판매에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평가다.

정씨의 목소리 자체는 별로 좋은 편이 아닌데다 듣기에 다소 지루하다는 지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이 배경음악도 없이 녹음한 시 낭송집 『대동강 앞에서』나 박범신씨의 소설 『바이칼 그 높고 깊은』 역시 저자의 육성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한 경우다.

그러나 소설이나 번역서들은 성우나 배우가 북텔러를 할 수밖에 없다.

오딧세이닷컴의 김성실 제작팀장은 "성우들도 읽는 톤이 고정돼있거나 조금만 오래 들으면 싫증이 나는 경우가 많다" 면서 "오히려 목소리가 다소 거친 듯이 느껴지는 연극 배우들이 북텔러로서 신선하고 매력적일 수 있다" 고 말한다.

『가시고기』에서 아버지의 나레이션 부분을 맡았던 장용철(35) 씨가 바로 그런 예. 극단 '작은 신화' 소속 연극배우이면서 연출가.극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오딧세이닷컴이 지난 1년여 간 내놓은 오디오북의 절반 이상(온라인.오프라인 포함 90여 편) 에 출연한 간판 스타다. 하지만 그도 초반엔 무척 고생했다.

"헤드폰을 끼고 처음 작업을 하다보니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나 뱃속의 꼬르륵 대는 소리가 크게 들려 제 스스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대본을 소리 안나게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았구요. 정말 NG 무지 많이 냈습니다. "

하지만 평소에도 독서를 즐기던 장씨는 첫 녹음이 있기까지 두달여의 훈련을 불만없이 받았다. 스스로도 좋은 책을 읽을 기회가 되고 목소리만으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오디오북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 21세기판 책 읽어주는 사람

A급 성우라 해도 아직 북텔러의 개념에 익숙치 않기는 마찬가지.

최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 오디오북의 나레이션을 맡았던 성우 구자형(37) 씨는 "오디오북은 라디오극이나 다큐멘터리와 달리 여러 명의 대화 장면까지도 혼자 다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어린이 대상의 구연동화 같아서도 안된다.

적당히 극적이면서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고 털어놓는다.

이 책을 낸 황금가지의 장은수 편집부장은 "특히 경제.경영서라는 성격에 맞도록 '책 내용을 스스로 이해할 만한 교양을 가졌으며, 듣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는 중저음의 남성' 을 기준으로 북텔러를 찾았다" 고 설명했다.

오디오 북이 점차 다양해지면 문학작품.경영서.실용서 등 분야별 특성을 살린 프로 북텔러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 아직 고정 직업으로 삼을 만큼 수입이 큰 직업은 못되지만 '21세기판 책 읽어주는 사람' 이 되는 일은 분명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오디오북이란…

오디오북이란 한마디로 '귀로 읽는 책' 이다. 테이프나 CD형식의 전통적인 '오프라인' 오디오북 외에도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MP3로 책의 일부분씩을 다운받아 들을 수 있는 온라인상의 오디오북까지 나왔다.

현재 미국은 오디오북이 전체 출판물의 10%를 차지할 정도. 세계적인 그래미 음악상에도 오디오북 경쟁부문이 일반.코메디.어린이용 등 셋이나 된다. 몇 년 전만 해도 원작을 축약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엔 테이프 18개 짜리 『죄와 벌』이 나오는 등 원작을 그대로 녹음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국내의 오디오북은 1970년대 인기를 모았던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등의 시 낭송집이 원조. 하지만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전문업체인

'오딧세이닷컴(http://www.audisay.com)' 이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가시고기』 『김홍경 동양의학특강』 등 베스트셀러를 60%정도로 축약해 2개의 테이프에 담은 오디오북들은 5천~1만부씩 거뜬히 팔렸다.

'소리아(http://www.sorea.com)' 와
'사운드북스(http://www.sbooks.co.kr)' 도 공지영 소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나 라디오극 형식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 다양한 책들을 선보이고 있다. 또 황금가지가 SBS프로덕션에 의뢰해 제작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은 발간 일주일만에 8천부가 팔려 막바로 재판을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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