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박근혜와 박정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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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질문한다는 건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프랑스의 한 역사학자가 한 말이다.

 어쩌면 그 의미를 가장 절감할 이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일지 모르겠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빈번하게 던졌던 이도, 근래 역으로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이도 박 후보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그는 한나라당이 박 전 대통령을 저평가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했다. 특히 이회창 총재를 향해서다. 박 후보는 묻고 또 물었다. 2001년 언론에 ‘이 총재 생각이 뭐냐, 화난 박근혜 거듭 다그쳐’란 제목이 뽑힐 정도였다. 당시 박 후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통령 선거에 나설 사람으로서 이 총재는 구체적인 역사인식을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 당내에서 선친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총재가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총재는 떼밀리듯 그해 6월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 산업화·근대화의 토대를 구축하고 경제를 발전시킨 점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동의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국민적 여론을 감안하면 ‘모범답안’이랄 만했다. 그러나 ‘위험’한 답변이기도 했다. 박 후보가 곧장 “경제적 업적은 인정했지만 (정치적으론) 독재자로 평가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쏘아붙였으니 말이다. 박 후보가 한때 한나라당을 떠난 건 이 총재의 ‘소극적’ 박정희관과 무관치 않다는 게 세평이었다.

 “5·16을 어떻게 보느냐” “유신에 대한 판단은” “인혁당 사건은” 등등. 요즘 박 후보가 받는 질문이다. 소재만 달리할 뿐 의도는 같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공과(功過) 평가다. 특히 과(過)에 주목한다. 박 전 대통령이 18년 통치했으니 소재는 많다.

 과거 이 총재의 답변이 박 후보를 등돌리게 했다면 요즘 박 후보의 답변은 많은 이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박 후보는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내가 그때 지도자였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봐야 되지 않겠나”라고 되묻곤 한다. 진정성을 강조한 거다. 잘못은 부인하는 뉘앙스다. 사과는 하는데 잘못했다며 하는 사과는 아니다.

 박 후보로선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자기 부정일 수 있다. 40년 가까운 인생을 말이다. 74년 어머니를 잃은 뒤 그는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 던지기로 했다”고 결심했다. 그 후 모든 판단의 잣대이자 생각의 출발점은 아버지였다. 80년대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재평가를 위해서였다. ‘박정희 유지’는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였다. 처음 의원 배지를 달 때 슬로건이 ‘박정희가 세운 경제 박근혜가 꽃피운다’였다.

 그렇더라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 언제나 손에 계량기를 쥐고 있는 사람은 본래의 무게를 잊어버리는 법이다. 박 전 대통령은 다수에게 ‘구국의 영웅’이 됐다. 그 시절 고문당했던 이도 산업화 공로엔 고개를 숙인다. 박 후보가 무조건적으로 감싸야 했던 그 아버지가 아닌 거다. 박 후보의 목표는 이미 달성됐다. 그런데도 더 요구한다? 과유불급이다. 권력자가 된 박 후보가 역사 해석마저 거머쥐려 한다고 느끼는 이가 많을 거다. 유신 시절을 단 1초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마치 오늘의 일인 양 유신에 분노하는 건 박 후보의 태도 탓이 크다. 박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도 과거사 얘기만 나오면 국가 지도자에서 누군가의 딸로 퇴행하는 모습에 답답함을 호소하곤 한다. 이전엔 박 후보와 박 전 대통령이 서로 끌어올렸다면 이젠 서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간 국민이 생각을 바꿔 왔다. 이젠 박 후보의 차례다. 열린 마음으로, 피해자의 시선으로도 바라봐야 한다. 역사가 통합의 무기인 건 통합적 인식이 전제됐을 때다. “박정희 시대를 아예 잊거나 부정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박 후보의 새로움이 만들어질 것”이란 강원택 서울대 교수의 진단은 옳다. 그래야 박 후보도, 박 전 대통령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