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독서칼럼] 37년만의 철학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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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세미나 주제는 동생애였고, 관례대로 말미에 한두 마디 논평할 차례였다. 게이니 뭐니 말만 들어도 속이 메슥메슥해지는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보태랴?

이럴 때는 정직이 최선의 방편이어서, 사회 일각의 그런 풍속에 돌을 던질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면서 적당히 피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기성 세대' 면책 사유가 통하지 않았다. "이쁜 여자를 보고 교수님이 성적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그들 역시 맘에 드는 남자한테 충동을 느끼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하고 직격탄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질문에 굳이 '교수님의 충동' 까지 들고 나온 것으로 보아 그 학생으로서는 작심하고 날린 펀치임이 분명하다. 이런 젠장.

***충동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 뒤에도 이따금 그날의 씁쓰름한 기억이 떠오르곤 했는데, 최근 찰스 테일러의 책 『불안한 현대 사회』 (이학사.2001) 를 읽다가 "그래, 그때 이런 식으로 얘기를 풀어나갈 걸"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적이 있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선택의 문제고, 차이의 문제라고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성행위 상대의 키가 크냐 작으냐든가, 머리가 금발이냐 갈색이냐 따위의 선택처럼 동생애는 개인의 기호(嗜好) 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와 이성애 논란이 과연 이렇게 차이와 선택으로 해소될 문제인??만약 동성과 이성의 선택이 기껏 이런 기호의 문제라면, 동성애와 이성애가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는 주장은 되레 논거를 잃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이 변호하고 강조하는 차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의 모순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 선택의 결과인데, 여기서는 기존의 성적 체험이나 생명에 대한 가치가 암묵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제 화제의 수준을 좀 높이자. 사실 이 책은 동성애 공방 따위는 안중에 없으며 원제대로 '모더니티의 불안' 을 걱정하고 있다. 위의 논의도 모든 선택은 차별이 없으며 각자의 선택이 행위에 정당성을 입혀준다는 주장이 잘못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당면한 불안의 근원을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자유의 상실로 정리한다. 각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 정하고 '자기 방식' 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이런 나르시시즘(narcissim) 이야말로 흔히 자기 방종을 숨기기 위한 덮개로 쓰인다는 것이다.

투입에 비해 산출을 극대화하려는 도구적 합리성 역시 경제적 효율을 향상시키는 대가로 우리의 삶 자체를 효율 경쟁 속에 파멸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개인주의와 도구주의의 결합은 실로 민주주의의 보루 자결권마저 시민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대 권력이 요리하도록 내맡기고 만다.

인간 실존 차원에서의 불안은 우리 삶의 '자기 중심성' 에 있다. 이 유행의 주범은 단연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 의 내용에 타인이 개입하면 안된다는 중립성의 자유주의, 상대의 관점을 반박할 객관적 방법 따위는 없다는 도덕적 주관주의, 그리고 현실 문제에 몰두해 도덕적 이상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이다.

그 결과 각자는 자아 실현의 목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키고, 인간 관계를 순전히 도구적으로 치부한다. 이런 사회적 원자주의는 "자신의 욕구나 열망 너머에 있는 것 - 그것이 역사, 전통, 사회, 자연, 혹은 하느님이라고 할지라도 - 에서 오는 요구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몰아붙여서" (79쪽) , 스스로 존경할 대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런 자기 중심성을 자기 진실성(authenticity) 으로 바꾸라는 것이 저자의 처방이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의미 있는 타인' 과 의사를 소통하고, 사물의 근거를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의미의 지평' 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하다.

마치 닭고기 대신 감자튀김을 고르는 것처럼 "어떤 선택이 객관적으로 보아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면 자기 선택이란 관념은…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버려서" (58쪽) , 결국 진정한 의미의 자기 선택도 아니고 니체적 의미에서의 자기 창조도 아니게 된다.

이렇게 어떤 사항이 유의미한 것인지의 여부를 내가 혼자 결정해버린다면 어떤 사항도 유의미할 수 없으며, 자기 선택의 이상(理想) 역시 자기 선택을 넘어서는 다른 사항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유효하다.

여기서 자기 진실성은 각자가 자신과 사회에 책임지는 '책임화 시대' 를 열게 된다.

***자기 중심성 대신 진실성

저자는 포스트모던 유행을 정면으로 공박하는 대신 모더니티의 가치를 적극 옹호한다. 예컨대 그는 의사의 전문 기술에 비해 간호사의 정서적 접근이 현대 의료에서 너무 낮게 평가되고 있다든가, 미국 개척시대의 벽난로와 현대의 중앙 난방이 가족의 삶에 던지는 의미는 엄청나게 다르다고 외친다.

그러나 현실적 대안은 궁색했던지 슬며시 '투쟁은 계속된다' 는 구호에 기댄다. 새만금 개펄에서 진주 찾기만큼이나 내 대학 성적표에서 A학점 찾기가 어려운데, 기특하게도 철학개론이 그 진주의 빛을 발하고 있다.

실용주의 철학을 누구의 말을 빌려 '속인용 철학' 이라고 휘갈긴 것이 채점관의 심금을 울린 모양인데, 37년 뒤 교수용 철학개론을 이렇게 읽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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