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과 매혹 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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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호 31면

얼마 전 충남 당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경기도 화성 방면 국도변에 조개구이와 생선회를 파는 식당이 대거 몰려 있었다. 마침 점심 무렵. 식당들은 의외로 한산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자동차가 가장 많이 서 있는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우린 주저 없이 앞마당에 차량 4대가 주차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낯선 곳에서 식당을 선택할 때 이런 방법을 쓴다. 식당 앞에 차가 많다는 것은 그곳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따라서 괜찮은 식당이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개인들이 필요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구하는 대신 타인들의 선택에 의존하는 현상을 ‘정족수 반응(quorum response)’ 또는 ‘정보전달 캐스케이드(cascade)’라 한다(렌 피셔, 『보이지 않는 지능』). 결과가 좋으면 이런 방법은 시간과 고민을 확 줄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손병수의 세상탐사

문제는 이런 현상을 역이용하는 경우다. 현실에서는 식당 앞에 일부러 차를 여러 대 주차시켜놓고 손님을 유혹하는 식당이 적지 않다. 이 경우 맛은 고사하고, 식당 주인이 동원한 차량 비용까지 포함시킨 밥값을 물고 나와야 한다.어디 식당뿐인가. 우리 주변에도 널려 있다. 규격화된 스펙 쌓기에 몸이 단 청춘이 참 많다. 실력보다는 포장이 요란한 사람들이 ‘출세’하는 바람에 부글부글 끓는 직장인들이 좀 많은가. 공공연하기로는 정치판을 빼놓을 수 없다. 정당마다, 정치인마다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동차를 잔뜩 늘어놓는다.

학교 무상급식이 표가 된다니 이 당 저 당 모두 공약을 한다. 대학생 반값 등록금이 20대에게 먹힌다니 여당, 야당 구분 없이 내건다. 경제민주화라는 구호가 그럴듯해 보이니 너도 나도 중구난방이다. 정당의 정체성이나 이념, 실행 가능한 재원조달 방안은 알 수 없다. 앞마당에 차량 숫자만 늘려 손님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현혹의 정치다.

여전히 정당의 무대를 외면하고 있는 안철수 교수의 장외정치도 일종의 현혹이다. 그는 보고 듣기 좋은 말과 정책 수단들을 모아 책을 내고, TV 예능프로그램에 나가 역시 하고 싶은 말만 한 후 높은 대중적 인기와 기대를 즐기고 있다. 대선가도에 들어선 여야 정치인들이 혹독한 검증을 받으며 여름내 비지땀을 쏟고 있는 동안 주차장에 자동차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영문 모르는 다른 차들이 가세하면서 그의 주차장은 이미 만차(滿車) 직전이다.

현혹의 정치는 실체와 콘텐트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국 눈속임이다. 짙은 화장으로 본모습을 감춘다는 점에서 분식이다. 이런 현혹의 대척점에 매혹의 정치가 있을 것이다. 정직과 용기에 갈고닦은 솜씨와 믿음을 버무려 손님이 제발로 찾아들도록 하는 식당 말이다. 정족수 반응은 어떤 선택이 이뤄지면 다른 개체들이 몰려들어 선택이 급증하는 경향이 있다. 그 선택에 참여한 개체들이 “아, 우리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공감하는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런 식당, 이런 매혹에 우린 늘 목이 마르다.
실낱 같지만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은 있다. 가령 대통령 후보 선출 직후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와 유족을 방문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행보는 어떤가.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있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박 후보의 봉하마을 방문을 돕고 평가해준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의 언행도 마찬가지다. 통합이나 화해, 상생 등에 대한 갈증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안철수 교수도 장외정치를 버리고 비전과 능력으로 검증을 받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신선한 메뉴로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다.

5년 만에 다시 대선 가도를 여행 중인 우리는 이번만큼은 최고의 식당을 찾아내야 한다. 5년마다 가는 길이지만 언제나 낯선 길이다. 늘 선택을 했지만 언제나 후회가 컸다. 주차장에 차가 잔뜩 서 있다고 무작정 찾아 들어가진 말자. 실제로 손님이 많은지 확인하고, 기왕이면 식사를 마친 손님에게 물어보기도 하자.
유명한 과학 칼럼니스트 렌 피셔는 앞서 인용한 『보이지 않는 지능』에서 “스스로 정보를 확인하는 독립성과 남의 판단을 활용하는 상호 의존성이 결합될 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작정 친구 따라 강남 가지 말라는 얘기다. 관찰하고 고민하라는 것이다. 이만큼 해봤으면 가려낼 때도 됐다. 현혹과 매혹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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