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스테이지] 카바레 20여곳을 뒤진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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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감독 임재영(48) 씨가 최근 가장 많이 다닌 곳은 캬바레다.

서울 장안동이나 신사동 일대 20여곳의 카바레의 정보라면 그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렇다고 '물'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춤꾼인 건 아니다.

그가 카바레를 헤집고 다닌 이유는 '조명' 때문이다. 올 가을 개봉 예정인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의 주무대는 카바레. 조명을 사실적으로 잡기 위해선 실제 카바레 조명이 어떤지를 알아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삶은 항상 이랬다. '사의 찬미' 촬영 때 윤심덕이 살았었음직한 일본식 가옥을 찾기 위해 몇 개월 동안 팔도를 헤맨 기억을 잊을 수 없고, 지난해 대박을 터트린 '공동경비구역 JSA' 에선 휴전선 갈대밭 장면 촬영지를 찾느라 엄청 고생했다.

좀 더 나은 촬영지를 고른 뒤 어떻게 색깔을 입힐 건지가 그의 평생 고민이었다. 그가 조명을 만진지도 벌써 24년. 이젠 이 분야에서 국내 최고라는 이름을 듣게끔됐다.

1977년 군대 제대후 친구 소개로, 이제는 작고한 차정남 조명감독을 만나 촬영장을 따라갔다. 인연은 거기서 시작됐다. 그날 분위기에 압도된 그는 곧장 영화계에 발을 들여놨다.

말이 '영화계' 지, 조수생활이란 게 뭘 배운다기보다 짐꾼에 지나지 않았고 월급도 제대로 받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영화가 좋다' 는 데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가 제대로 보수같은 보수를 받아본 것도 따지고 보면 불과 4~5년 전부터다.

오랫동안 조명 수업 기간을 거친 그는 88년 김유진 감독의 '시로의 섬' 으로 '조명감독' 이 됐다. 그후 '은마는 오지 않는다' '테러리스트' '정사' '접속' '텔미 섬 딩' '공동경비구역 JSA'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영화들의 조명을 도맡아왔다.

임감독은 '조명은 시나리오에 충실해야 한다' 는 원칙을 갖고 있다. 아무리 조명이 영화 속에서 '빛의 예술' 이란 소리를 듣지만, 결코 혼자 튀어서도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감독이 원하는 색을 찾으려 노력한다" 고 말한다.

영화판에서 조명이 차지하는 역할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특히 배우들에게 민감한 요소다.

조명은 조작하기에 따라 못생긴 얼굴도 멋있게, 예쁜 얼굴도 밉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임감독이 꼽는 조명을 잘 받는 배우는 최민수와 고소영.이미숙이다.

이목구비가 또렷해 조명을 갖다 대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얼굴들이라는 것.

또 평소 임감독에게 유난히 친숙하고 싹싹하게 대하는 배우들이 있다.

조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배우들이다. 전도연이나 송강호가 대표적이라는 데, 이들은 하나같이 극중 역할에 심취하고 몰두하는 일욕심 많은 이들이다.

"조명도 하면 할수록 어렵네요. 빛은 말이 많아서. " 선문답같은 얘기다.

하지만 이제 영화판에서 조명은 '젖줄' 이란 얘기도 들을만큼 대접이 나아졌다. 배우나 감독의 화려함에 비하면 조명 파트는 여전히 '음지' 다. 그는 그 곳에서 빛과 씨름하고 포옹하며, 그렇게 잡아낸 빛으로 이야기하는 영원한 조명기사로 남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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