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 장사꾼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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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호 35면

근엄한 헌법이나 법률 조항 중에는 그 낱말의 의미와 중요성이 간과된 채 들어갔다는 뒷얘기가 심심찮게 있다.
요즘 시끄러운 헌법 제119조의 ‘경제 민주화’ 단어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1987년 전두환 정권 시절 돌연 헌법을 고치게 됐다. 국민의 거센 민주화 요구로 군사정권이 사실상 항복하고 ‘6·29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합의해 마련한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더 이상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지 말고 국민 손으로 직접 뽑자는 거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이 조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정말 소소하게 느껴져 큰 충돌 없이 넘어갔다는 게 개헌 작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실례로 제66조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라는 구절에서 비민주적 단어인 국가원수라는 말을 이참에 빼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위기 때 국민통합을 위해 필요하다는 얘기에 큰 논란 없이 넘어갔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들어간 제119조의 1, 2항도 이 같은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시래의 세상탐사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문구의 흐름이 다소 어색하고 ‘경제 민주화’가 아닌 ‘경제의 민주화’라고 돼 있다. 여기에서 “…통한 경제의 민주화”라는 말은 빼도 전체적인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런데 여당인 민정당 측의 김종인 전 의원(박근혜 새누리당 경선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은 개헌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강력한 의지로 경제 민주화라는 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재벌 규제 등을 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해 놨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야당인 신민당 측의 국회 개헌특위 간사였던 박찬종 전 의원은 당시로선 ‘정치 민주화’가 화두였기 때문에 경제 쪽의 대구(對句) 개념으로 ‘경제 민주화’를 넣었을 뿐이라는 반론이다. 더구나 신민당이 마련한 헌법 초안에 이 문구가 담겨 있었고 민정당의 반대를 꺾고 자신들이 관철시켰다고 했다. 특히 경제 민주화라는 의미도 재벌을 칼질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독과점의 폐해가 없도록 하자는 취지였다고 박 전 의원은 주장한다.

어쨌든 대통령 직선제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경제 민주화 조항이 25년이 지난 지금 이토록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사회 분위기가 바뀐 데 편승해 정치인들이 경제 민주화로 ‘낱말 장사’를 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재벌 총수라고 해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법원의 엄단 분위기, 사회 양극화에 따른 부유세 추진 논란, 동반성장 요구로 대기업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에 편승해 정치인들이 싸잡아 ‘경제 민주화’라고 외치고 있다. 새누리당은 점입가경이다. 박근혜 경선 후보가 경제 민주화의 상징으로 영입한 김종인 공동선대위원장을 김문수 예비 후보가 “날려버리겠다”며 각을 세웠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당내의 경제 민주화 법안 추진과 관련해 “경제 민주화는 내용이 문제”라며 못마땅해 한다.

주도권을 빼앗긴 민주당의 문재인 예비후보는 정치 민주화는 됐으니 이젠 경제 민주화를 해야 한다며 시리즈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의식은 다르다. 경제는 글로벌 경쟁력을 이미 확보했지만 정치는 한참 멀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비례대표 공천 장사’ 의혹까지 불거진 마당에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민주화가 안 된 곳은 정당과 국회뿐이라는 말에 토씨를 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독재적 민주주의’라는 말과 같다고 배웠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의 유신 시대였으니 돌
이켜보면 그 선생님은 참으로 용기 있는 분이었다. 민주주의면 민주주의이지 한국적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순수한 민주주의 단어 앞에 그럴듯한 수식어를 한두 개 더 붙이는 사람들은 본질과 상관없이 그것을 제멋대로 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많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현혹시키려고 썼던 수법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요즘 유행하는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도 유신시대의 한국적 민주주의 발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경제는 경제고, 민주화는 민주화일 뿐이다.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를 끄집어내 저성장·양극화의 분노를 대기업에 돌리려는 정치인들의 속셈을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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