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을 말한다] 下. 부모 시각부터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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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조조정기를 거치면서 어린이책 시장은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다.

세상살기가 각박할수록 믿을 것은 '학력' 과 '지식' 밖에 없다는 듯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입시 경쟁으로 내몰고 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 책값은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책방에는 수입한 번역물들과 얕은 지식을 주는 고만고만한 책들이 가득히 쌓여간다.

좋은 책을 골라주려는 부모들에게 어린이도서연구회(어도연) 에서 권장도서를 선정하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아직도 국내 어린이책 시장을 가장 크게 차지하는 것은 학습지와 전집물이다. 그러나 어도연의 경우 방문판매에 의존하는 전집물은 아예 비평대상에서 제외한다.

소비자가 한 권씩 골라 살 수 없으며,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담기보다 기획출판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단행본 중에서도 작가의 건강한 생각이 담긴, 정성들여 만든 책인지 잘 살핀다. 가령 19세기에 나온 명작동화들 중에도 '제국주의의 관점이 강한 책' 이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담은 책' 은 엄격하게 가려낸다.

또 처세술이나 교훈이 강하게 담긴 이솝우화류도 권하지 않는다. 어린이를 얕잡아 본 듯 얄팍한 지식과 교훈을 담은 책, 성인을 위한 문학을 함부로 다이제스트한 책들도 빼낸다. 삼국지나 위인전.역사책을 대상연령을 무시한 채 펴낸 경우도 제외한다. 그렇다보니 대체 무슨 책을 읽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금의 어른들은 대개 명작동화나 우화가 주를 이루는 전집을 읽으며 자란 세대다. 『하이디』나 『15소년 표류기』, 『삼국지』와 『이솝우화』부터 읽고 자란 어른들은 자기 아이들도 이같은 책부터 읽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21세기에 태어나 더 먼 미래를 살 아이들에겐 또다른 책이 필요하다.

어도연에서는 인종적 편견이 담긴 『톰소여의 모험』 대신 그런 생각에 항의하는 『달빛 노래 』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춤추는 노예들』을, 『80일간의 세계일주』 대신 『샬롯의 거미줄』을 권하는 것이다.

또 외국책보다는 국내작가의 작품을 우선 읽혀주기 바란다. 책은 아이들에게 '자기생각' 을 갖게 해주고 올바른 정체성을 키워 가게 해준다.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겐 자기와 같은 모습을 한 주인공, 같은 시대.같은 환경을 살아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까다롭게 고르는데도 불구하고 어도연 권장도서는 학년별로 70권이 넘는다. 한 어린이가 한 해 동안 읽기엔 오히려 벅찰 수 있는 양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그 가운데서도 자기 아이에게 적절한 책만 또 한번 골라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겐 책 읽고 공부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노는 시간도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무들과 부대끼며 뛰놀 시간이 없다면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나 삶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도 사실 불가능하거나 거짓이 될 수 있다. 책읽기조차 또 하나의 학습으로 여기게 해선 안된다. 그러려면 부모가 좋은 책, 내 아이에게 적절한 책만 엄격하게 골라 읽히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또 책과 더 친해질 수 있다.

이성실 <어린이도서연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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