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엉뚱한 곳 긁고 있는 대선 주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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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정치권이 연말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승부처로 삼는 모양이다. 글쎄다. 어쩌면 배부른 소리고, ‘소문난 잔치’에 그칠 수 있다. 어느새 슬그머니 경제위기가 다가와 우리 발밑을 뿌리째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과 화합’의 정치적 구호는 사치스러울지 모른다. 대선에 다가갈수록 “닥치고 경제”의 비명 소리가 천지에 가득할 불길한 조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한번 익숙한 풍경과 마주쳐야 한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의 시즌2를 보는 것이다. 다시 한번 “진짜 경제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옥석 가리기가 진행될 게 분명하다.

 2012년 경제위기는 과거와 다르다. 더 위험하고 심각한 데 비해 예고편이 없다. 예전 경제위기 때는 금융 쪽에서 요란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외국인 자금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면서 주가·환율·금리 같은 가격변수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제주체들이 모두 긴장했고, 위기의식으로 무장한 채 공습에 대비했다. 정부는 구제금융을 쏟아붓고 재정을 넉넉히 풀었으며, 기업은 구조조정과 수출확대로 돌파구를 찾았다. 가계의 재무구조는 비교적 튼튼했다.

 반면 이번 위기는 어뢰공격처럼 다가오고 있다. 소리 없이 접근해 금융 쪽을 건너뛰어 바로 실물경제를 타격하는 기세다. 요즘 주가·환율·금리는 멀쩡하게 버티고 있다. 미국·유럽 경제가 쑥대밭이 돼 외국인 자금이 탈출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사이 생산·판매·소비·수출 등의 실물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엉망이 되고 있다. 7월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8.8% 감소했고, 3분기 경제성장률은 제로 수준으로 떨어질 조짐이다. 발밑에서 버블제트가 터지면서 치명상을 입고 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최대 수출시장인 유럽·중국이 휘청대고 환율조차 꿈쩍 않으면서 수출확대는 기대하기 힘들다. 턱밑까지 차오른 정부 부채로 인해 과감한 재정출동도 한계가 있다.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지난봄부터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민간소비는 꽁꽁 얼어붙고 있다. 한마디로 답이 안 보인다. 수출·소비·재정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어진 것이다. 세계 경제가 풀릴 때까지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걱정은 깊은 내상(內傷)을 입은 가계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하락의 이중고에 짓눌려 있다. 정부가 프리 워크아웃과 만기 시 신용대출 전환이란 대책을 내놓았지만 양날의 칼이다. 현재의 상환 부담을 미래로 떠넘겼을 뿐이다. 빚 내서 빚 갚으며 끝까지 버티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만약 경기가 좋아져 가처분소득이 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다행이다. 거꾸로 저성장에 빠지거나 집값이 추가로 하락하면 더 큰 폭탄이 터지게 된다. 저성장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엄청난 재앙을 피할 도리가 없다. 경제 민주화나 복지를 확대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머지 않아 대선 주자들은 선거 구호부터 바꿔야 할 듯싶다. 현실적인 삶이 위협당하는 유권자를 의식하면 경제 살리기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아마 ‘사람이 먼저다’의 슬로건은 ‘경제가 먼저다’로, ‘저녁이 있는 삶’은 ‘경제가 있는 삶’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경제 살리기부터 이루어지는 나라’로 갈아타야 할 것 같다. 민망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경제위기에 대처하려면 위화도 회군은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 주변에 하우스 푸어, 깡통 주택, ‘부채디플레이션’ 등이 보통명사로 굳어지고 있다. 그 굴레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대선 주자들은 추상적인 선거구호에 매몰돼 있는 느낌이다. 참고로, 최근 ‘국민이 바라는 차기 정부’ 조사에서 응답자의 36.0%가 물가 안정을, 32.3%가 일자리 창출을 첫 손에 꼽았다. 이에 비해 경제 민주화는 12.8%, 복지 확대는 6.7%에 불과했다. 유권자들의 절박한 현실과 대선 주자들의 고상한 슬로건 사이의 거리가 아득하다. 신을 신은 채 발을 긁는다는 격화소양이란 옛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