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서 피어난 사랑 그린 '인디언 썸머'

중앙일보

입력

벼랑 끝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은 그녀는 "어떤 사람한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에요. 살아 있는 동안은 기억해야 하니까" 라며 어떤 변호도 거부한 채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스스로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한 남자가 있다. 생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 그녀를 만난 그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사랑에 빠져든다.

"죽고 싶단 말이 살려 달란 말보다 더 절실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라며.

노효정 감독의 데뷔작 '인디언 썸머' 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여자를 살리려는 변호사 서준하(박신양) 와 "살고 싶지 않다" 는 말로 사랑을 밀어내는 여인 이신영(이미연)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늦가을에 잠깐 찾아오는, 무더운 여름 같은 날을 뜻하는 '인디언 썸머' (Indian summer) 는 이들의 사랑이 곧 차거운 겨울로 향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 상당히 극적이다.

아름다운 풍광이 비치는 해변과 한적한 폐교,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구멍가게 등 멜로에 어울릴 법한 곳이 자주 등장하긴 해도 작품의 주요 배경은 법정과 감옥이다.

이 곳은 장벽 앞에 선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이자 이뤄질 것 같지 않은 사랑을 암시하는 공간이다. 서준하는 불리한 재판 과정을 뒤집을 만한 사실들이 밝혀지자 필사적으로 변호에 나서는데, 국내 영화에선 보기 드문 법정 공방이 그런대로 실감나게 그려진다.

그러나 '인디언 썸머' 가 깔끔한 영화이긴 해도 법정 장면에서 톰 행크스의 '필라델피아' 나 제시카 랭의 '뮤직박스' 가 보여줬던 탄탄한 긴장감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편지' 나 '선물' 처럼 관객이 연인의 애절한 사랑에 빠져들만한 대목도 많지 않다. 씨줄과 날줄로 얽힌 두 이야기의 축이 서로 충돌하는 탓이다.

법정 공방은 재빨리 멜로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깊이를 잃어버렸고, 서로 교감하기보다 기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사랑은 아무래도 밋밋하다. 그리고 법에 익숙하지 못한 관객들을 고려했다면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사형의 경우 자동으로 이뤄지는 항소에 대한 설명이 대사 속에 충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체념과 절망에 어린 대사를 읊는 이미연의 연기는 주변 분위기를 제압할 만큼 힘이 있고 '킬리만자로' 이후 스크린에 처음 나온 박신양 역시 멜로에 통하는 연기자답다.

또 폭주족 역의 최상학은 톡톡 튀는 연기로 양념 역할을 잘 해내고 사무장 역의 장용은 드라마의 완급을 능숙하게 조절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등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노감독이 곳곳에 배치해 놓은 절제된 대사들은 이 영화의 비밀 병기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Note〉

'사랑한다' 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멜로다. 만져지는 사랑이 아니라 기억하는 사랑이기에 '인디언 썸머' 처럼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