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 감성·직관이 M&A 성패 가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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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27면

“회장님, B사의 적정 밸류에이션은 1000억원입니다. 1500억원은 너무 높습니다”.
“아니야, 밀어붙여요. 우리가 꼭 인수해야 해.”

딜로이트와 함께 하는 기업 M&A

대기업 총수인 K회장은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온 B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당초 예정했던 호가를 무려 500억원이나 높이라고 전략 담당 임원에게 주문했다. 그 임원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가격에 인수하면 이른바 ‘승자의 재앙’을 맞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입찰 경쟁에서 이겨도 너무 비싸게 산 후유증으로 인수 주체가 위험에 빠질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기우였다. K회장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B기업 인수 후 모기업과 이 회사는 시너지 효과를 내며 매출이 동반 상승했다. 덕분에 다른 계열사들도 성장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무모해 보였던 투자가 선견지명의 결단으로 판명된 셈이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숫자놀음만으론 M&A 성공 못해
이처럼 기업 M&A(Merger&Acquisitions) 현장에서 전문가들의 과학적 판단과 합리적 계산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 M&A 전문가들 사이에선 밸류에이션(Valuation)이란 말이 자주 쓰인다. 기업가치 평가액쯤 되는데 이보다 높은 값에 팔리는 매물이 속출한다. 그 밑바탕에는 인수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수자 측 기업주나 최고경영자의 판단이 깔려 있다. 재량권이 큰 최고경영진이 자신의 감각과 직관력, 인수 의지를 앞세워 끝장 승부를 불사할 때 값은 높아진다. 인수 측 오너 입장에서는 계산기 두드린 기업가치 수치보다 장래성 같은 무형의 가치를 기대하고 과감하게 베팅에 나선다.

밸류에이션은 분명 중요하다. 이를 무시하고 과도한 값을 치렀다가 실패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밸류에이션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재무자료 등 수많은 데이터와 관련 산업의 동향 등 다양한 가정과 전제를 근거로 얻은 과학적 결과물이다. 객관적 기업가치 산정을 위해 어려운 수학적 모델과 회계 기법이 동원된다. 가장 흔한 방법은 현금흐름 할인법이다. 기업의 미래 현금창출 능력을 현재가치로 환산해 기업의 몸값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미래 실적을 정확히 계산해 내지 못할 경우 가치판단의 편차가 커지는 단점이 있지만 현실적이며 유용한 방식으로 널리 활용된다.

주목할 것은 합리적 계산 외에 감성적 요소가 M&A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큰 변수로 떠오른다는 점이다. 플라스틱 가공회사를 운영하는 L사장은 최근 회사를 M&A 시장에 내놨다. 그는 값을 비싸게 쳐주는 사람보다 경영능력과 사업 열정을 두루 갖춘 인물을 찾고 있다. 평생 일궈온 자식 같은 회사를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인수 후 기업을 더 키울 수 있는 뜻있는 사람에게 매각하고 싶다. 실제로 이처럼 비(非)가격적 요인에 의해 M&A 거래가 크게 좌우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런가 하면 T사는 S회장의 감각적 판단 덕분에 매물로 나온 호텔을 잘 인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 고급호텔 경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영진이나 외부 전문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텔을 사들였다. 제조업을 주력으로 삼은 회사가 호텔사업을 해 얻을 시너지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이 주된 반론이었지만, S회장은 호텔업 성장성에 기대를 걸었다. 몰려드는 해외관광객을 호텔 공급이 따르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져 좀체 식을 줄 모르는 한류(韓流) 열풍과 몰려드는 중국인 관광객 속에서 호텔 숙박 수요가 급증일로다.

M&A 후 통합관리(PMI) 역시 감성의 영역이다. PMI(Post-Merger Integration)란 M&A 후 이질적인 두 조직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두 기업의 내부 조직과 리더십·기업문화 등을 통합함으로써 진정한 시너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임직원들의 화학적 결합이다. 물론 쉽지 않다.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고 칼로 무 베듯 단숨에 정리할 일도 아니다.

휴비스는 PMI의 대표적 성공사례
SK케미칼과 삼양사의 폴리에스테르 합작법인 휴비스는 PMI의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합병 초기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직원들의 장래 불안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덜기 위해 대표이사는 틈나는 대로 현장을 방문해 직원들을 상대로 합병의 배경과 향후 경영비전을 설명하는 등 다양한 스킨십을 시도했다. 공평한 진급기회를 주고 성과급제도를 합리화하는 등 제도적 뒷받침도 있었다. 휴비스는 합병 이후 10여 년간 화기애애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M&A 후 인적 통합을 이끌어 내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 예상했던 것만큼의 시너지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업가치가 하락하고 최악의 경우 인수한 기업까지 휘청거리는 상황으로 치닫곤 한다. 실제로 국내 F대기업은 1990년대 중반 미국의 한 글로벌기업을 큰돈을 들여 인수했으나 낭패를 봤다. 사들인 기업과 화학적인 결합을 하지 못해 인재가 이탈하면서 결국 미국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많은 경우 인수기업이 피인수기업의 조직문화를 무시한 채 일방적인 방식을 이식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또 다른 굴지의 대기업은 PMI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곤욕을 치른 뒤 M&A 콤플렉스를 갖게 됐다. 이 역시 피인수기업 종업원의 감정과 기업문화를 살피지 않아 점령군 같은 인상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PMI를 비롯해 M&A 과정에서 좀 더 소프트한 시각과 감성으로 접근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 재정위기와 그에 따른 글로벌 경기둔화로 어수선한 가운데 M&A 시장은 국내외를 통틀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꾸준한 편이다. 오히려 경기가 나쁠 때 자금난에 시달리는 알짜기업이 싼값에 매물로 나오곤 한다. 국내에선 근래 사모펀드(PEF)를 비롯한 재무적 투자자들이 가세해 M&A 시장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M&A에 뛰어들 경우 소프트하고 감성적인 유연성을 좀더 갖춰야 한다.

M&A는 계약서에 사인하기까지 난관이 많지만, 그 후 제대로 통합과정을 거쳐 경영성과를 내기까지 더 큰 어려움이 도사린다고 한다. 먼저 M&A 진행과정에서 과학적 데이터와 정보에 기반하되 중장기적 시장 전망과 성장성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딜(deal)이 성사된 뒤에는 사람과 조직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질적인 조직을 화학적으로 융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성공적인 M&A에는 숫자 너머를 볼 수 있는 고도의 감성이 요구된다.



홍순재 경희대에서 환경학을 공부하고, 싱가포르국립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했다. 산업은행 싱가포르지점 투자은행(IB)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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