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 “영국 감독의 무시 발언에 이 악물고 뛰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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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열린 올림픽 남자축구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영국을 꺾은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종우·백성동·황석호·오재석·구자철·남태희·박주영.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10년 전 주장 완장을 차고 2002 한·일 월드컵 4강을 이끈 홍명보(43)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이 이번엔 지휘봉을 잡고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5일(한국시간)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영국과의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8강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한국 축구를 64년간 가둔 8강의 벽을 허물었다.

 ◆기분 좋은 2002년의 데자뷰=한국은 전반 29분 지동원(21·선덜랜드)의 선제골로 리드를 잡았지만 이후 상대에게 두 개의 페널티킥을 내주며 급격히 흔들렸다. 전반 36분 오재석(22·강원)의 핸드볼 파울로 허용한 첫 번째 페널티킥에서 애런 램지(23·아스널)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5분 뒤 주심이 또다시 페널티킥을 선언했지만 골키퍼 정성룡(27·수원)이 막아내 추가 실점 없이 전반을 마쳤다. 양 팀의 운명은 승부차기에서 갈렸다. 한국은 구자철(23·아우크스부르크)·백성동(21·주빌로 이와타)·황석호(23·산프레체 히로시마)·박종우(23·부산)·기성용(23·셀틱) 등 다섯 명의 키커가 모두 골망을 흔들었다. 반면 영국은 마지막 키커로 나선 공격수 대니얼 스터리지(23·첼시)의 슈팅이 이범영(23·부산)의 손끝에 걸렸다.

 10년 전 2002 월드컵을 떠오르게 했다. 정확히는 스페인과의 8강전 데자뷰였다. 당시 120분을 0-0으로 마친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4강에 올랐다. 한국의 마지막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켰던 홍 감독은 이번엔 사령탑으로서 기성용의 위닝샷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봤다.

 ◆한국 축구의 자존심 지켰다=영국은 한국과의 맞대결을 앞두고 ‘무시하기’로 일관했다. 스튜어트 피어스 영국 감독은 경기 전 공식 기자회견에서 “선수들의 구체적 특징은 전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오직 팀으로서의 한국”이라고 했다. 영국 취재진도 주로 한국 대신 4강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브라질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축구 종가’를 자부하며 한국 축구를 ‘변방’쯤으로 치부한 영국의 오만함은 선수들의 투지에 불을 질렀다. 기성용은 경기 후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영국 감독이 우리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모두가 ‘개최국인 영국이 8강에서 떨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점들이 더욱 이를 악물고 뛰게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경기 전 홍 감독은 선수들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반드시 이겨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지키자”고 주문했다.

 승리 뒤 라커룸은 선수단 화합과 승리의 기쁨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선수들은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를 틀어 꼭 메달을 따자는 의지를 다졌다. 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으니 최선을 다하자는 뜻이었다.

 ◆브라질 넘어 결승도 가능하다=준결승 상대 브라질은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네이마르(20·산토스), 레안드루 다미앙(23·인테르나시오날), 헐크(26·포르투) 등으로 꾸려진 공격진은 4경기에서 매번 세 골씩 터뜨렸다. 반면 수비는 불안하다. 4경기에서 5골을 내줬고, 무실점은 1경기에 불과하다. 대회 직전 주전 골키퍼 하파엘 카브랄(22·산토스)이 부상으로 낙마해 골키퍼와 수비진의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 한국은 8일 오전 3시45분(한국시간) 맨체스터 에서 브라질과 결승행을 다툰다.

카디프=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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