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어디로 가나

중앙일보

입력

도서정가제 고수를 내걸고 지난 12일 시행에 들어갔던 도서할인율 합의(10% 할인, 5% 마일리지 적립)는 거의 모든 인터넷 서점에서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들은 한국출판인회의와의 도서할인율을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벤트''나 ''기획 할인''이라는 명목으로 합의 시행 이전과 다름없는 할인판매를 하고 있다.

23일 현재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인 예스 24는 베스트셀러 1-300위 서적들에 대해 판촉 이벤트의 일환으로 오는 29일까지 30% 할인율을 적용하고 있다.

이들 도서중 ''10+5'' 이내에서만 할인율을 적용하기로 합의한 한국출판인회의 소속 출판사들의 신간 서적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다른 유력 인터넷 서점인 알라딘도 상설 할인코너에서 「엄마랑 함께 읽는수학동화」(중앙 M&B) 등 20종 정도를 30% 할인판매하고 있으며 일단 다음달 중순까지 이같은 할인판매 체제를 유지할 계획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출판인회의와 도서할인율에 합의한 다른 2개 인터넷 서점 와우북과 북스포유도 마찬가지여서 할인율 합의 자체가 사실상 백지화되고 있다.

이들 인터넷 서점은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합의에 참여하지않은 군소 인터넷 서점 북파크가 합의 시행 바로 다음날인 13일부터 주요 신간 및베스트셀러 서적의 40% 할인판매에 돌입한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한 인터넷 서점 관계자는 "지난 12일 할인율을 10%로 낮추었으나 다음날 북파크가 할인율을 대폭 상향조정하자 고객들이 북파크로 몰려간 현상을 경험했다"며 "국내 인터넷 고객들은 가격 따라 옮겨다니는 속성이 유난히 강하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북파크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인터넷서점들의 할인시장 참여라는 새로운 변수의 등장에 따라 시간을 벌어 보겠다는 인터넷 서점들의 속셈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서점들이 상황에 따라 도서 할인율 합의 준수 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예스 24의 권승아 홍보팀장은 "인터넷 서점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이벤트를 하지 말고 합의안을 준수해 시장을 안정시켜 나가자''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라고 전했다.

인터넷 서점들이 할인율 합의안을 확실히 폐기하지 않고 이처럼 어정쩡하게 양다리 작전을 걸치고 있는 데는 종전 방식의 무한할인 출혈경쟁은 곧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 인터넷 서점들은 평균 판매가 대비 15% 정도의 수익률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정도로는 직원들의 인건비와 전산망 업그레이드 및 유지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도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 출판 전문가는 진단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조속한 시일내에 인터넷 서점들과의 합의 할인율을 뿌리내린다는 목표 아래 소속 출판사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서점들과의 개별 도서 할인율 공급 계약 체결을 종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정가제의 현행 유지는 매우 불투명한 실정이다.

도서정가제가 허물어질 경우, 도서가격 상승과 인문과학 서적 출판의 붕괴, 일부 자금력 약한 출판사들의 연쇄도산 등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도 도서정가제를 사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출판인회의의 이승용(홍익출판사 대표) 유통대책위원장은 이에 대해 "도서정가제는 정부, 출판사, 서점, 소비자라는 네 바퀴가 아귀가 맞아야 굴러갈 수 있다"면서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도서정가제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려는 곳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김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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