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속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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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35면

그날 송대남(33)의 눈빛은 강렬했다. 지난 2일 새벽 런던 올림픽 유도 90㎏급 결승. 후배에게 밀려, 세월에 떠밀려 억지로 올린 체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올림픽이었다. 유도선수로는 환갑 나이에 맞은 인생 역전의 기회였다. “상대가 몸이 부드러워서 업어치기로는 안 되겠데요. 그래서 업어치기를 시도하는 척하면서 안뒤축을 후렸지요.” 맞수 아슬레이 곤살레스(쿠바)를 잠시 주시하던 그가 몸을 던졌을 때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연장전 10초 만이었다.
송대남의 금메달 장면을 새삼 돌아보는 이유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그의 인생 역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승전보에 승부세계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식이 담겨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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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적의 허점(하체)을 관찰하고 방향을 설정한 뒤(업어치기로 유인) 대응책을 정해(안뒤축 후리기)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겼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미국 공군의 전투교범인 우다(OODA) 사이클과 정확히 일치한다. 60여 년 전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 장교 존 보이드가 개발한 이 전략 개념은 ‘목표를 관찰하고(Observe), 방향을 설정한 뒤(Orient), 최선의 대응책을 결정해서(Decide), 행동하라(Act)’는 뜻이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개발한 제트전투기가 처음 공중전을 벌인 전장이었다. 1950년 11월 한반도 상공에 첫선을 보인 미그-15기는 당시 미 공군의 주력 제트기 F-86보다 성능이 앞서 미군 조종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살아남은 존 보이드가 작성한 훈련 교범이 바로 ‘우다 사이클’이었다. 성능이 다소 뒤지더라도 우다 사이클을 적보다 빨리 실행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실전에서 입증됐다. 이후 우다 사이클은 미 공군의 전략적 대응원칙이 됐으며, 나아가 정치와 스포츠·기업경영 등 승부세계에 두루 적용되는 공식으로 정착했다.

뉴욕타임스의 간판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지난해 펴낸 『미국 쇠망론(That Used To Be Us)』에서 미국이 쇠퇴하는 이유를 우다 사이클을 들어 설명했다.

“오늘날 미국의 우다 사이클은 너무 느리고 종종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미국의 정치적 담론을 살펴보면 관찰, 방향 설정, 의사결정, 행동이라는 측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잦은 고성, 자기주장 옹호, 편가르기, 결정의 회피만 있다. 급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변화를 관찰하고 방향을 설정한 뒤 의사를 결정하여 행동에 착수하는 국가의 속도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프리드먼이 고민하는 국가의 속도는 오늘 한국의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다 사이클에 적정 속도란 없다. 존 보이드는 “오직 적보다, 경쟁자보다 빠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주 한국은행이 발표한 한국의 대외의존도는 2011년 현재 113.2%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수출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가리키는 대외의존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가장 높다. 외국과의 경쟁에 최대한 노출된 나라일수록 우다 사이클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돌려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속도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그나마 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스포츠나, 세계 시장에서 정상을 다투고 있는 일부 기업을 제외하면 그림이 더욱 선명해진다. 레임덕에 빠져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정부, 이미 2%대로 떨어진 성장률 등이 한국의 급격한 감속(減速)을 상징하고 있다. 프리드먼이 지적한 ‘잦은 고성, 자기주장 옹호, 편가르기, 결정의 회피’는 우리가 훨씬 심하지 않은가.

12·19 대선이 넉 달 반 남았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포함해 차기 정권을 잡겠다고 나선 대선 주자들이 한국의 우다 사이클을 되살릴 수 있을까. 아직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어느 후보도 목표를 정확히 관찰해 제대로 방향을 제시한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이슈인 경제 민주화 역시 여야 모두 명확한 실체를 제시하지 못한 채 유권자 표만을 노린 허접스러운 정책 수단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최종 주자들이 확정되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볼 뿐이다.

정치의 최종 수요자인 국민의 책임도 있다. 위험 수준인 국가의 속도를 되살려낼 후보를 찾아내서 정확히 표를 던지는 시민의 우다 사이클을 실행해야 한다. 어느 경쟁자보다 빨리 우다 사이클을 돌려서 승전보를 쏟아내고 있는 런던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처럼. 맞수를 쏘아보던 송대남의 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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