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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700번 혁신 말해야 직원들 움직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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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23면

신창재(사진) 교보생명 회장은 의사 출신의 2세 경영인입니다. 고(故) 신용호 창업주의 장남으로 마흔일곱에 경영권을 물려받았죠. 신 회장이 경영수업 중이던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교보생명의 지급 여력 비율은 73%, 현재의 감독 기준으로는 이미 망한 회사였습니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통해 이 회사를 2004년 이후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생명보험회사 빅3 중 줄곧 1위인 알짜 회사로 키웠습니다. 그가 취임한 2000회계연도에 2540억원에 달하던 적자는 11년 만인 2011년에 5455억원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자기자본은 그 기간 14.7배로 성장했죠. 이 회사는 또 생명보험사 중 유일하게 무디스 신용등급 A2를 4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논란 많은 건설업 프로젝트파이낸싱 투자의 부실률은 제로입니다. 현장에서 땀 흘리는 재무설계사의 발을 씻어주고 영업 현장 직원들과 한데 엉켜 어설픈 막춤을 추는 그는 소통을 끔찍이 여기는 리더이기도 합니다. 실적 개선의 비결은 ‘비전 경영’이랍니다. “교보생명에선 회장 위에 비전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신 회장의 비전 경영론을 3회에 걸쳐 싣습니다.

CEO 일요 경영산책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①

회사 파산 가짜 뉴스로 위기의식 고취
“국내 굴지의 생명보험사 교보생명이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금융감독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 회사의 도산을 공식 확인했습니다.”
2000년 봄 사내 연수원에서 열린 교보생명 전사 전략회의 도중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느닷없이 모 지상파 방송의 TV 뉴스 리포트가 떴습니다. 제가 경영을 맡은 초창기 회의였고, 저는 무대 위 연단에 서 있었습니다. 제가 연설을 중단했고, 술렁이던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500여 명의 간부는 이것이 지어낸 가상 뉴스라는 걸 이내 알아챘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가슴을 쓸어 내리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런 ‘깜짝쇼’는 제가 지시한 겁니다. 외환위기 이후 회사 존망이 백척간두에 있다는 사실을 강도 높게 주지시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어요. 좀 짓궂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 제 입장에선 부친이 세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영혼이라도 팔 만큼 절박했습니다. 그날 회의 주제는 ‘변화와 혁신’이었습니다.

1997~2000년 저희 회사는 총 2조4000억원의 자본손실(고정자산을 다 판 금액을 해당 자산의 장부가액에서 뺀 금액)을 기록했습니다. 다른 금융회사나 대기업들처럼 공적자금을 수혈받을 만한 정도의 위기였죠. 당시엔 생보 업계 전반에 비상식적인 영업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설계사들이 고객 만족에 매진하기보다 회사 할당 목표를 달성하기에 급급했죠. 심지어 월 영업마감일에 실적이 영업목표에 미달하면 친척이나 친구 이름을 적당히 적어 넣고 자기 돈을 입금시키는 가짜 계약이 성행했습니다. 하긴 요즘도 이런 관행이 업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진 않았지요.

이른바 비전(Vision)이라는 것, 즉 회사의 중장기 목표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고객 선호도 1위 회사’였습니다. 2010년까지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아 중장기 전략을 짠 뒤 전사·전국적으로 이를 공유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교육의 힘이지요. 종전에는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거절당하지 않고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까’ 같은 판매기법 위주의 교육을 했다면 이제는 ‘보험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업(業)에 대한 자긍심·사명감을 고취하는 교육에 힘썼어요.

성과 관리의 ‘품질’도 개선했습니다. 일례로 이익을 내지 못하는 매출, 고객 불만을 대가로 얻은 실적은 온전한 성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업 문화를 이런 식으로 바꾸는 데 10년이 걸리더군요. 혁신을 하려면 새로운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는 한편 버릴 것을 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발목 잡는 제도 파괴 위원회’를 만들어 43건의 사규와 매뉴얼을 개선하거나 폐기했습니다.

혁신은 경영자·직원 진정한 소통에서
변화를 부르짖다 보니 저 자신도 변하더군요. 취임 초창기에 사내 연설문은 관련 부서에서 써준 대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듣는 임직원들이 별로 관심도 없고 집중도 잘 하지 않더라고요. 사실 이런 의전이 최고경영자(CEO)로 하여금 현장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담당자가 써온 초안을 소화한 뒤 제가 자주 쓰는 용어와 말투를 섞어 뜯어고쳤지요. 그랬더니 집중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CEO가 직접 쓰고 늘 하는 이야기이니 업무 결재도 그런 원칙과 방향에 따르리라는 걸 직원들도 알게 된 거죠. 이렇게 몇 년 했더니 제 머릿속에서 일종의 논리체계가 잡혀 메모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이 그때그때 저절로 나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책에서 본 건데 혁신 등을 할 때 CEO가 700번 반복해서 말해야 직원들이 이해하고 기억한다고 하더군요.

너나 없이 혁신을 말하지만 막상 혁신이 잘 되지 않는 건 구성원들에게 그럴 만한 동기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성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사명감과 자긍심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저마다 자신의 목표와 할 일이 무언지 명확히 알도록 하고 이를 수행할 업무역량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 또 크고 작은 성과가 나오면 회사가 이를 인정하고 적절히 보상해 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원을 충분히 해 주되 능력과 창의성이 있는 사람에겐 자율권을 더 줘야 합니다.

사명감과 자긍심이 생기려면 업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례로 성당을 지으려면 벽돌을 쌓아야 합니다. 이때 석공들이 자신의 일을 벽돌 쌓기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와 성당 건축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성과가 다를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일의 목적과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자발적으로 노력하게 마련이죠. 교보생명은 우리 사명을 ‘고객이 미래의 역경에 좌절하지 않도록 필요한 보장을 도와드리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이 문구에는 ‘보험’이란 말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목적은 보험상품을 파는 것이라기보다 고객에게 보장을 해 주는 겁니다. 설계사는 보험을 파는 직업이 아니라 고객에게 보장을 선사하는 직업인 셈입니다. 이렇게 설명했더니 장기 근속한 고참 설계사 중에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이 있더군요. 설계사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다 싶었던 듯합니다.

제가 경영혁신을 부르짖기 6개월 전, 훗날 두산그룹 회장을 지낸 박용현 당시 서울대병원장이 이미 혁신에 불을 댕겼습니다. 저에게는 대학 9년 대선배죠. 그 시절엔 종합병원의 입원실을 청소하던 아주머니 중에 쓰레기 버리는 환자들에게 타박을 주는 경우가 적잖았습니다. 박 원장님은 아주머니들을 자주 모아놓고 이렇게 타일렀답니다. “아주머님의 일은 병실을 깨끗하게 하는 겁니다. 만일 환자와 보호자들이 여러분을 배려해 휴지 하나 버리지 않는다면 아주머님들의 일은 필요가 없어져요. 그래도 좋나요.” 환자들을 구박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고 해요. 환경미화원은 시민을 위해 주변을 청결하게 만드는 사람이지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어떤 일을 하든, 특히 3D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 일의 사회적 가치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발적인 노력과 보람은 여기서 나옵니다. 자, 어느 쪽이 일을 더 잘 할까요. 고객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할까요. 누가 더 빨리 성공할까요. 업의 본질을 꿰뚫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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