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4) - 어니 뱅크스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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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뱅크스는 1931년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디 뱅크스는 상점 종업원이었지만, 댈러스의 세미 프로 팀인 블랙 자이언츠에서 선수로 활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12자녀 중 둘째였던 어니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며 야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소년 어니는 야구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목화밭에서 일하게 되었고, 하루에 2달러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이 당시에 남부의 흑인들이 처해 있던 현실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육상과 농구, 미식축구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나, 그에게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준 종목은 따로 있었다. 소프트볼 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텍사스의 흑인 세미 프로 야구 팀에 스카우트되었고, 팀을 따라 남부 일대를 순회하게 되었다.

그의 기량은 곧 니그로 리그의 강팀 캔자스시티 마너크스에 알려졌다. 마너크스는 1년 연봉으로 수백 달러에 달하는 '거액(뱅크스에게는 실로 거액이었다)'을 제시하였고, 뱅크스는 결국 이 팀에 입단하여 새철 페이지와 자시 깁슨 등의 대스타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또한 시즌 종료 후에는 재키 로빈슨과 래리 도비 등이 주축이 된 흑인 올스타 팀 소속으로 여러 지역을 순회하였고, 로빈슨과 키스톤 콤비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시는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의 인종차별 장벽을 무너뜨린 직후였다.

그러나 이 때 한국전이 발발하였고, 미군 병력의 증강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뱅크스도 군복을 입게 되었다. 그는 1951년 3월 독일 주둔군의 일원이 되었고, 군대에서 2년을 보냈다. 그의 복무 기간 중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 빌 빅은 독일로 편지를 보내어 뱅크스에게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 팀에 입단하라'라는 권유를 하기도 하였으나, 뱅크스는 이를 사양하였다.

뱅크스는 1953년에 돌아온 뒤 마너크스에 복귀하였고, .386의 타율과 20홈런을 기록하여 자신의 기량이 여전함을 입증했다. 커브스의 마이너리그 팀에서 일하던 탐 고든은 그의 활약을 지켜본 뒤 매료되었고, 팀의 단장 위드 매슈스에게 연락을 취하여 뱅크스를 스카우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전했다.

매슈스는 팀 스카우트들로 하여금 마너크스를 따라다니며 뱅크스를 관찰하게 했고, 이들은 돌아와서는 하나같이 뱅크스의 기량에 대한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에 뒤이어 뱅크스를 지켜보고 온 코치 레이 블레이즈도 마찬가지였다.

매슈스는 결국 뱅크스를 직접 관찰하기로 하고, 시카고에서 열린 니그로 리그 올스타전을 관전하였다. 커브스의 지역 라이벌인 화이트 삭스에서도 관계자가 나와 이 경기를 지켜보았지만, 뱅크스를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사실 화이트 삭스는 뱅크스보다는 보강할 투수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경기 후 매슈스는 마너크스의 구단주 탐 베어드를 찾아가, 뱅크스를 트레이드로 데려가겠다는 제의를 했다. 베어드는 트레이드 머니로 1만 5천 달러를 요구했고, 매슈스는 여기에 5천 달러를 더 얹어서 뱅크스와 함께 투수 빌 디키(양키스의 대스타였던 포수 빌 디키와는 다른 인물)까지 넘겨받았다.

그러나 커브스의 구단주 필 리글리는 흑인 선수 영입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1950년대 초반에는 브루클린 다저스가 로빈슨에 이어 조 블랙과 로이 캄파넬라를, 뉴욕 자이언츠가 만티 어빈과 윌리 메이스를 영입하는 등 니그로 리거 스카우트 붐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리글리는 시대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시카고는 본래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였으며, 리글리는 흑인 선수를 함부로 받아들일 경우 커브스의 근거지인 시카고 북부의 백인들이 분노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시 시카고 백인들의 의식 수준은 캡 앤슨 시절보다 나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팀에 흑인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커브스도 1950년에 흑인 선수 한 명을 스카우트한 바 있었다. 진 베이커가 바로 그 선수로, 가능성을 인정받는 유격수였다. 그러나 매슈스는 베이커를 빅 리그로 승격시키기를 주저했고, 베이커는 커브스의 팜 팀인 LA 에인절스에 계속 머무르다가 1953 시즌 말에야 시카고행을 통보받았다.

리글리가 매슈스에게서 또다시 니그로 리거를 영입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은 이러했다. "이미 우린 흑인 하나를 빅 리그에서 기용하기로 했소. 그거면 됐지 무엇 때문에 또 한 명을 데려온다는 거요?"

매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데려오기로 한 선수의 룸메이트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매슈스가 뱅크스를 데려온 목적은, 베이커에게 룸메이트를 만들어 주는 데에도 있었다. 백인 선수들이 베이커와 같은 방을 쓰려 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하여 베이커를 외톨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당시 커브스의 주전 유격수는 로이 스몰리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베이커와 뱅크스가 주전 유격수 물망에 올랐다. 커브스는 결국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은 베이커가 뱅크스보다는 새로운 포지션에 잘 적응할 것으로 판단하여 그를 2루수로, 뱅크스를 유격수로 기용하기로 했다.

(3편에 계속)

※ 명예의 전당 홈으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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