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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태어나 혁명으로 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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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근대(近代) 인류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다. 많은 나라가 혁명으로 봉건시대를 끝내고 근대로 진입했다. 영국 청교도혁명(1649년), 미국 독립혁명(1776년), 프랑스 대혁명(1789년), 중국 신해혁명(1911년), 러시아 10월 혁명(1917년), 그리고 독일 혁명(1918년) 등이다. 이들 나라에선 민중이 혁명의 주체였다. 민중이 왕조를 뒤엎거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하지만 어떤 나라에선 미처 민중이 주체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 변방 국가였는데 이런 나라에선 군인들이 혁명을 단행했다. 이런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 불린다. 세계 학자들은 5개를 꼽는데 일본 메이지 유신(1867년), 터키 케말 파샤(1922년), 이집트 나세르(1952년), 페루 벨라스코(1968년), 그리고 박정희 5·16(1961년)이다. 5개는 형식에서 모두 쿠데타나 무력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혁명이다. 쿠데타나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잡았지만 국가 근대화를 이뤄내 국민의 존경을 얻어낸 것이다.

 1867~68년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사무라이 혁명가들은 왕정복고(王政復古)의 쿠데타로 메이지 천황 정부를 세웠다. 이 세력의 캐치프레이즈는 부국강병이었다. 새 정부는 근대적인 학제와 징병제를 도입하고 토지세를 개혁했다. 서양식 자본주의로 경제의 틀을 짰으며 입헌 정치제도를 구축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근대국가로 태어났다. 이승만 정부의 개혁보다 8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완성한 1881년 터키에서는 무스타파 케말이 태어났다. 그의 꿈은 왕정 술탄제를 없애고 근대적인 민주·독립국가 ‘터키’를 건국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는 무력을 바탕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1922년 터키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케말은 활발한 개혁으로 근대적인 정치·사회체제를 만들었다. 터키 국민은 그를 ‘조국의 아버지’라 부른다.

 1968년 남미 페루에서는 벨라스코 육군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강력한 민족주의로 미국 회사의 석유채굴협정을 파기했다. 그러고는 미국인이 소유한 땅을 접수해 농민에게 배분했다. 근대적인 토지개혁이었다.

 ‘위로부터의 혁명’ 중에 박정희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이집트 나세르다. 나이 차도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둘 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군인이 됐다. 쿠데타는 나세르가 9년 앞섰다. 나세르는 1952년 국왕 파루크를 추방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농지를 개혁하는 등 봉건제도를 타파했다. 나세르는 쿠데타 4년 만에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박정희가 2년 만에 민선 대통령이 된 것과 비슷하다. 나세르는 1970년 사망했으니 박정희와 집권기간(18년)도 같다. 나세르는 쿠데타 2년 후에 『혁명의 철학』을 저술했다. 박정희도 5·16 2년 후에 『국가와 혁명과 나』를 썼다.

 진보·좌파의 비판자들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했다는 불법성에만 집착한다. 근대화와 경제개발이라는 혁명적 업적은 외면한다. 이런 태도는 ‘긍정적인 쿠데타’라는 역사적 개념을 모르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혁명가’ 5인에게 쿠데타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었다. 5·16 쿠데타와 유신 개발독재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국가개조와 경제개발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불가피한 시기에 불가피한 지도자가 불가피한 독재를 함으로써 ‘행운의 국가 궤도’로 진입할 수 있었다.

 혁명에는 피가 필요하다.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주요 국가의 혁명그룹은 왕을 포함한 지배계급을 많이 죽였다. 반면에 5·16은 무혈(無血)이었다. 대신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라는 냉혹한 독재를 선택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어쩌면 한국인이 피 대신 지불해야 했던 대가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유신 독재의 피해자들은 역사 발전을 위한 숭고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5·16은 쿠데타로 태어나 혁명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