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가득한 산의 맥박-'한국의 영산'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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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고요함을 간직한 산들. 멀수록 흐릿해져 가는 봉우리들은 담담한 서기를 뿜는 듯 하다. 다다를 수 없는 먼곳을 바라보며 참선을 하는 듯한 돌탑들도 눈에 띈다.

오는 4~22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 상(02-730-0030)에서 열리는 '한국의 영산(靈山)' 전은 산의 기운과 사람의 정갈한 마음을 함께 담은 작품들을 보여준다.

20여년간 산에 매달려 온 한진만(53.홍익대 동양화과)교수가 3년만에 여는, 통산 8번째 개인전이다. 5백호 안팎의 대작 13점을 포함, 모두 35점의 수묵화를 출품했다.

영기를 머금은 석탑과 산세가 조화돼 신묘한 상생의 기운을 띠는 마이산, 산세와 길과 여백이 한 호흡으로 맞아 떨어지는 청량산, 겸재 정선에서 소정 변관식.청전 이상범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온 금강산 등 3곳의 영산 연작이다.

작가는 홍익대 재학시절인 20대 초반부터 시작한 산행을 요즘도 꾸준히 계속 중인 준 산악인. "산에 오르면 기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개의 움직임, 산의 맥박이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산의 여백까지도 피부에 닿아요"

초기에 관념산수로 시작한 그의 화풍은 90년대 들어 진경산수로 바뀌게 된다. 그의 산들은 실제 대상에 충실하지만 대상에 담긴 기운과 그에대한 자신의 해석을 함께 담고있다.

마이산 그림에선 산의 영기가 가득히 느껴진다. 특히 수많은 석탑들이 간절한 소망으로 무언가를 비는 듯한 사람들로 형상화된 작품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청량산 연작에선 마이산의 석탑을 확대해 놓은 듯 솟아오르는 돌산의 산세가 높은 기상을 느끼게 한다.

금강산 만물상을 단순화해 소용돌이나 파장의 이미지로 그려낸 작품들은 강하고 세찬 기운을 드러낸다. 수많은 봉우리들은 꼿꼿한 선비나 강인한 무인들의 군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작들은 대부분 산을 사람처럼 여기고 그린 의인화된 산들" 이라며 "그동안 도봉산, 설악산, 대둔산, 두타산 등 수많은 산을 다녔지만 마음에 가장 일체감을 준 곳은 위의 3곳" 이라고 말했다.

화면은 자신이 개발한 황토안료를 이용해 푸근한 느낌이 든다. 곳곳에서 채취한 주황색, 붉은색, 황금색의 황토를 먹물과 섞어 썼다.

황토색은 땅만이 아니라 때로는 하늘도 채워 통상적인 여백의 관념을 흔든다. 순수하게 흰 여백은 때로 허공이 아닌 산 중턱에도 나타나면서 주변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통 수묵산수화의 깊은 경지를 추구하는 작가는 "진정한 의미의 전통은 골동품처럼 단지 관람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감상자에게 새로운 것을 제시하며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기운을 내뿜어야 한다" 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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