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친중 vs 반중 분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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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제19차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가 열린 캄보디아의 프놈펜은 뜨거운 외교 경연장이었다. 참가국들의 이해가 얽히고 충돌했다. 하지만 큰 줄거리는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었다.

 올 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외교의 중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기겠다”고 선언한 뒤, 미국은 아세안을 향한 외교에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일본·몽골·베트남·라오스를 거쳐 프놈펜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네 나라는 중국과 영토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는 국가들이다. 반중국 연대의 틀을 미리 짜고 회의장에 도착한 셈이다.

 반면 이미 G2(주요 2개국)의 한 축으로 훌쩍 성장한 중국의 아세안 영향력은 컸다. 중국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받아 건설한 ‘평화궁전’에서 회의를 주최한 캄보디아는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의 입장을 거들었다. 북한과 태국은 친중국 외교 노선을 흔들리지 않고 유지했다.

 미·중의 외교 대리전이 치열했던 만큼 회의의 결과물은 작았다.

 올해 ARF 외교장관 회의는 19년 역사상 처음으로 성명 채택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을 정도로 진통을 겪었다. 무엇보다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이견 때문이었다. 필리핀과 베트남은 공동성명에 중국이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침범한 사실을 담자고 주장했지만 의장국인 캄보디아는 거부했다.

 의장국인 캄보디아가 막판 각국의 의견을 절충해 탄생한 의장성명에는 지난 4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문구도 포함되지 않았다. 북한 핵 문제에 관해 “추가 도발을 해서는 안 되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정도였다. 회의 기간 중 북한 박의춘 외상은 “북한의 핵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위용”이라며 “미국의 핵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역시 “당사국들이 무력을 사용해선 안 되며, 국제법상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정리됐다.

 이번 회의는 G2 시대를 맞은 한국 외교의 숙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클린턴 장관은 한·미·일 외교장관회의에서 3국 공조라는 틀 안에 한국을 단단히 묶어 놓았다. 워싱턴에 ‘한·미·일 3국 간 정례 협의를 위해 실무 운영그룹을 설치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통해서다. 그러다 보니 한·미·일 연대는 북·중 연대라는 반탄력을 키웠다. 북한은 회의 내내 중국을 거들었다. 12일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양제츠 장관에게 한·중 군사정보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한·미·일 3각 연대가 군사동맹이 아니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중국 측에 강조한 셈이다. 양 장관의 답변은 “잘 들었다. 추이를 지켜보자”였다.

 프놈펜 회의는 끝났다. 하지만 미·중의 영향력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클린턴 장관은 13일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태국·미얀마를 위해 50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건강·환경 등의 분야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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