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수길 칼럼

우리나라 좋은 나라 - 투자와 일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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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수길
주필

닥치고 투표는 안 통했다. 묻지마 심판론도 별로였다. 정치판이 흥행을 앞세운 예능판이 되려 하자 예능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조차 고개를 돌렸다. 저질은 제풀에 사라졌고 진영 논리와 정치공학은 예전처럼 먹혀들지 않았다.

 4·11 총선은 그렇게 치러졌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대안·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쪽을 찍겠다는 것이 4·11 총선 표심이었다. 선거 결과를 가르는 2040 세대가 특히 그랬다. 대선은 총선과 다르지만 표심은 같다.

 총선 이후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정치판은 많이 달라졌다. 유권자들이 가르친 것이다. 흥행·정치공학 없는 대선을 생각할 수 없지만 대선도 결국 구체적·현실적 내용을 내놓아야 이긴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아직 다 나서지 않았지만 대선 주자들 출사표에는 공통점이 둘 있다. 하나는 다들 한결같이 국민을 위한다는 것(!). 또 하나는 바로 일·자·리 창출이다. 그렇다. 표심을 잡을 핵심이 일자리임을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출마 선언을 한 차례대로 짚어 보자.

 “김문수는 일자리 대통령입니다”를 내건 김 지사는 대통령 직속 ‘일자리특별위원회’를 신설해 일자리 창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키다리 아저씨’ 정몽준 고문은 나눔의 성장 선순환 시스템을 ‘일자리-사다리-울타리’로 제시하면서 일자리를 맨 앞에 놓았다.

 개헌을 강조하는 이재오 고문도 출마선언문 중간에서 “국가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일자리 창출에 두겠다”고 했다.

 손학규 고문의 출마선언 10대 강령 제1번은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완전고용국가’를 실현하겠습니다”이다.

문재인 고문은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대통령 직속 ‘국가일자리위원회’를 설치하고 매달 상황을 점검·독려하겠다고 했다. 훗날 ‘일자리 혁명을 일으킨 대통령’으로 평가받기를 희망한다고도 했다.

 가장 먼저, 제 1번, 최우선, 대통령 직속-.

 대통령 후보로서 이 이상 갖다 붙일 강조 어법은 없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이제 이미지나 강조 어법만 보고는 표를 주지 않을 만큼 많이 안다. 표심을 잡는 것은 일자리 공약의 진정성이고 실현 가능성이다.

 누구라 말 안 하겠지만 위의 대선 주자 중 경제와는 거리가 먼 평소 됨됨이로 보아 일자리 공약이 영 미덥지 못한 정치인도 있다. 또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성장 역시 강조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정책들이 성장·일자리를 뒷받침하도록 잘 짜여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다들 메뉴가 비슷한 점이 걸린다.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 규제 완화도 정책에 넣고 서비스업·중소기업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김문수 지사가 다를 뿐 나머지는 다들 비슷하다. 상생·민주화·정규직·4.0·녹색·공동체·근로시간단축 등이 단골 메뉴다. 옳은 소리들인데 문제는 이런 메뉴들이 기존 일자리 ‘나누기’ 위주이지 새 일자리 ‘더하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좋은 일자리 ‘더하기’는 투자 없이는 어렵고 투자는 나라 안팎을 다 보아야지 인구·내수가 뻔한 이 나라에서만 찾아서는 길이 안 보인다. 나라의 틀을 바꿀 만큼의 구상 없이는 좋은 일자리를 크게 늘릴 방법이 없고 그 해답은 기존 경제자유구역을 들여다보면 나온다.

 우리는 들어오는 투자보다 들고나가는 투자가 훨씬 많은 나라다. 그러니 일자리가 만족스럽게 늘 턱이 없다. 그걸 고쳐보자고 경제자유구역을 여섯 곳이나 지정했는데 무늬만 자유구역이지 교육·의료·환경·오락 등에 관한 규제가 여전해 황무지인 경우가 태반이다. 가장 낫다는 인천 송도에서 10년째 외국인 영리병원 설립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음에랴.

 의료 영리법인은 건강보험 환자를 받지 않는 병원이다. 자기 돈으로 의료비 다 내고 치료받겠다는 환자만 받는 병원이다. 그런 병원을 허용하는 미국에서도 하버드나 존스홉킨스 대학 병원은 비영리 법인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허용한다 해도 서울대·삼성·아산 병원 등은 영리법인으로 갈 이유도 없고 갈 수도 없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의료체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의료 형평이라는 괴상한 우상에 사로 잡혀 좋은 일자리 크게 늘릴 병원을 경제자유구역 안에 세울 기회를 10년째 묶어놓고 있다.

 투자와 일자리란 이런 것이다. 우리 국가 신용등급이 올라간 것은 꿔준 돈 떼일 염려가 적다는 소리지 투자하기 좋은 나라라는 평가가 아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물려주려면, 늙어서도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누리려면, 대선 주자들이 어떻게 어떤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눈 부릅뜨고 따져보자. 2040을 잡아야 대선에서 이긴다는데, 삶이 팍팍해 좋은 일자리에 목마른 2040은 충청권·영호남·수도권·강원도에 다 있다.

김수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