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노인 돌보러 갔다가 성희롱…" 신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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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경기도 고양시의 신장투석환자 할아버지(80)를 돌보는 요양보호사 이모(52·여)씨는 요사이 땡볕에서 밭일을 한다. 밭 도랑에 물을 주고 비닐하우스에서 고추와 깻잎을 딴다. 지난 5월부터 농사일에 동원됐다. 할아버지는 할머니(76)와 990㎡ 규모의 밭에 고추·상추 등을 재배한다. 이씨는 너무 힘들어 2일에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그는 “할머니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차마 안 들어줄 수 없다”며 “거절하면 요양보호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까 봐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말했다.

대구 수성구의 한 요양보호사가 치매노인 집을 방문해 걸레질을 하고 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치매노인을 돌보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의 핵심인 요양보호사들이 신음하고 있다. 성희롱을 당하거나 고유 업무 외 김장 담그기, 과수원 농사일 돕기, 손님 밥상 차리기, 가족 빨래 하기 등의 가욋일을 강요당하기 일쑤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일 이들의 노동 인권을 개선하라고 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지방자치단체에 권고했다.

 요양보호사는 가족을 대신해 치매노인을 돌보는 ‘사회적 효자손’이다. 덕분에 장기요양보험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이 최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93.7%가 “노인장기요양제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93.2%는 “몸이 불편해지면 장기요양서비스를 이용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요양보호사 본인들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요양보호사 정모(48·여)씨는 “우리 스스로 ‘정부 인정 파출부’라고 한탄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다 저급한 일자리로 격하시키는 제도 탓이다. 요양보호사는 104만 명이 배출돼 25만 명이 현장에서 일한다. 처음에는 괜찮은 일자리 같아 너도나도 자격증을 땄지만 대다수가 장롱면허 신세가 됐다.

 보건복지자원연구원이 지난해 7~10월 요양보호사 943명을 조사한 결과 가정 요양보호사의 50.6%가 치매노인 가족의 빨래와 청소를, 38.4%는 가족의 밥·반찬을 만들고 김장을 했다고 답했다. 이들의 평균 월급은 67만원에 불과하다.

 요양보호사들이 열악한 생활을 하는 이유는 정부가 재정 부담을 우려해 요양보험 수가(酬價·서비스 행위의 가격)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2011년 소비자물가는 9.8% 올랐지만 방문요양 수가는 동결됐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요양보호사 정책에 있다. 2008년 제도를 도입하면서 240시간 교육만 받으면 자격증을 줬다. 요양보호사가 부족하면 대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다. 104만 명 중 80만 명이 이렇게 자격증을 땄다. 일부에서는 중국동포 요양보호사가 질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치매노인은 올해 52만 명이지만 2020년엔 75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요양보호사 제도를 지금처럼 유지하면 질이 떨어져 환자에게 좋을 게 없다”고 지적한다. 대구재가노인복지협회 김후남 회장은 “최소한 1년짜리 교육 과정을 거치거나 전문대학에 관련 학과를 만들어 방문요양 프로그램 등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요양보호사가 돼야 한다”며 “그래야만 전문 기술을 발휘해 서비스 질을 높이고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다”고 말했다. 또 김 회장은 “지금처럼 ‘주부 부업 차원’에서 자격증을 따서 현장에 나가면 직업의식이 낮아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해 금방 그만두고 질도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윤경 연구위원은 “요양보호사들이 가사 지원을 하려면 왜 자격증을 땄겠느냐”며 “청소·식사 등 가사지원 업무와 씻기 같은 신체수발 업무를 분리해 수가를 책정해 노인돌봄 전문가로서 요양보호사의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요양보험 서비스 수가의 인건비 비율을 설정하고 ▶교대·휴식 등을 고려해 인력배치 기준을 강구하고 ▶성희롱 발생 서비스 제공 기관을 제재하고 ▶평가지표에 요양보호사의 근로조건을 담을 것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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