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차 12량에 모은 내 보물 50만 점 기증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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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이우로 관장이 첫 지하철인 1호선에 투입됐던 객차 안에서 1927년 일본제 치과용 기기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첫 지하철 1호선용 객차 10량과 우편용 2량을 약 10억원을 들여 산 뒤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박물관 전경.

경기도 여주군 옛 대신초등학교 옥촌분교. 1999년 폐교된 이 학교의 교정에는 박물관 건립을 목표로 진귀한 유물 수집에 평생을 바친 한 노(老)수집가의 꿈이 내려앉고 있었다. 수십억원대의 가산을 몽땅 팔아 평생 50만 점의 유물을 모아 온 한얼테마박물관 이우로(86) 관장. 그는 2000년부터 교육청으로부터 폐교를 빌려 박물관을 열었다. ‘한얼테마박물관’이라고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입구 간판이 아니면 작은 컨테이너 한 구석을 집 삼아 살고, 박물관 분위기 나는 고풍스러운 건물 하나 없는 이곳에 진귀한 물건이 가득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쓰러질 듯한 2층짜리 한 동의 교실을 둘러싸고 있는 12량의 지하철 객차와 컨테이너를 보니 영락없는 창고나 전동차 폐차장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장고이자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동 객차와 컨테이너, 교실에는 세계에 한두 개밖에 없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들어 있다. 전동 객차는 우리나라 첫 지하철인 1호선에 투입됐던 것이다. 이 관장이 10여억원에 사서 갖다 놓은 것이다. 50여만 점에 이르는 수장품을 개인이 모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국 올리버사의 1912년 영문타자기, 미국 GE사의 1934년도 가정용 냉장고, 서울역 옛 청사에 걸렸던 대형 시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식탁, 임진왜란 때 사용하던 조총, 에디슨 축음기…. 희귀한 물건이 즐비하다. 그가 자신의 분신 같은 수장품 모두를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대전 국립중앙과학관(관장 박항식)에 무상으로 영구 기탁하기로 했다. 중앙과학관은 이 관장의 소장품 위주로 9월 ‘빛과 소리가 있는 특별전’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이 관장 소장품을 옮겨 갈 계획이다.

미국 GE가 34년 생산한 ‘모니터 탑’이라는 모델의 가정용 냉장고.

 “과학문화관과 산업디자인유물관 등 테마박물관을 지어 청소년 체험장을 만들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관하기도 버거워 기탁하기로 했어요.” 그는 50~60년대 신문기자를 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 남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먹고살 거리’가 박물관이라고 생각해 본격적인 유물 수집에 나섰다고 했다. 30대 젊은 나이 때 돈키호테 같았던 생각이 인생 항로를 바꿔놓은 것이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워 처음에는 의료기기 수집에 매달렸다. 그러다 전문성과 욕심이 생기자 분야를 넓혀갔다.

곁에 50여만 점이 쌓였지만 대가는 컸다. 60년대에는 동양란과 분재 농장을 해 큰돈을 만졌다. 일본 관광객에게 당시 좋은 분재 한 개를 1000만원에 팔기도 했다. 재산이 불었다. 서울 진관외동 등에 집 세 채와 농장 등 수십억원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많던 재산은 유물 수집 비용을 대느라 바닥이 났다. 주위에서 “미쳤다”는 말이 들렸다.

부인과 자녀 6남매도 날마다 쌓이는 ‘고물’에 넌덜머리를 내며 멀리했다. 결국 자식들이 출가하자 집까지 다 팔아 혼자 컨테이너 생활을 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다고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얼마 전까지 후계자가 없어 고민하던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딸 희세(53)씨가 그의 뒤를 잇기 위해 박물관학을 공부하러 다니는 등 아버지를 이해해서다. 과학관에서 가져가지 않는 고서화 등을 분류하던 희세씨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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