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커비전] 월드컵은 선진축구 즐길 호기

중앙일보

입력

1994년 미국 월드컵 때의 일이다. 6월 17일 한국과 스페인 경기가 열렸던 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은 43도의 찜통이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려 5만6천여명의 관중이 몰렸다.

후반 초반 살리나스와 코이코체아에게 골을 내줘 패색이 짙던 한국은 후반 40분 홍명보의 프리킥 골로 추격하기 시작, 경기 종료 직전인 44분 서정원의 동점골로 2 - 2 무승부를 이뤘다.

당시 현장에서 중계를 하던 필자는 하도 감격스러워 목멘 소리로 "기적입니다" 라고 연신 외쳤다.

워낙 극적이다 보니 미국 관중들도 경기 후 흥분을 삭이기가 쉽지 않았다. 한 중년 부부는 필자에게 "역사의 현장에서 호흡을 같이 한 이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득점 선수 이름을 적어달라" 며 대회 책자를 내밀었다. 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축구를 직접 경기장에서 관전한 부부였다.

88년 7월 4일 국제축구연맹(FIFA)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94년 제15회 월드컵 대회 개최지로 미국을 선택했다. 모로코와 브라질을 물리친 의외의 결과였다.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축구의 신천지' 미국 국민들은 월드컵 개최권을 큰 선물로 받아들였다.

반면 전세계 FIFA 회원국들은 축구의 불모지인 미국이 과연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를까 우려를 많이 했다. 그러나 대회 공식 보고서는 미국 월드컵을 관중 3백56만명, 수입 5억8천만달러를 기록한 성공한 대회로 정리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입장권 신청이 한국전과 빅경기에만 몰리고 있다.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1차분 입장권 신청마감 1주일 전인 8일까지 집계한 결과, 부산.대구.인천에서 열리는 한국의 예선전은 각각 5백26%, 3백35%, 1천3백45%의 높은 신청률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이 아닌 나머지 예선전의 신청률은 50%에도 크게 못미쳐 자칫 텅빈 경기장에서 월드컵을 치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특히 지방의 예선 두 경기의 신청은 더욱 심각했다. 제주가 25%와 17%, 전주 37%와 26%, 대구는 18%와 14%에 불과한 실정이다.

우리 국민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 주요 이벤트 때면 밤잠을 뒤로 한 채 축구에 빠져 열광한다. 새벽에 벌어졌던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74.8%).벨기에전(74.6%)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멕시코와 네덜란드에 연패 후 국민들은 선수 기용과 작전의 실패를 힐난할 정도로 전문가 수준의 안목을 자랑(?)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서울에서 열린 코리아컵에서 월드컵 3위 크로아티아와 멕시코가 경기를 가졌지만 불과 수천명의 관중만이 경기장을 찾았던 기억을 상기하면 과연 우리 국민이 진정 축구를 사랑하고 즐기는지 강한 의문이 생긴다.

한국 경기의 승패에만 매달리는, 편향된 스포츠 문화에서 탈피해 다양한 세계 축구를 살피고 즐길 수 있는 선진 스포츠 관전 문화의 정착 시점이 바로 2002 한.일 월드컵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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