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 내 가족들 풀어주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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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 오길남씨가 28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 정문 앞에서 북한에 남겨진 두 딸을 풀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제네바=연합뉴스]

“내 식솔들은 단지 노쇠하고 연약한 여인들에 불과하고 당신(김정은·사진)의 정권에 어떠한 해악을 끼칠 능력도, 의지도 없을 것이니 나의 처와 두 딸을 제3국으로 추방해 달라. 그럼으로써 당신은 당신 아버지(김정일)와는 다른 사람이며, 또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신호를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될 것이다.”

 ‘통영의 딸’ 신숙자(70)씨의 남편 오길남(70)씨가 28일(현지시간) 북한에 남겨진 두 딸 혜원(36)과 규원(33)을 풀어 달라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앞으로 눈물의 편지를 보냈다. 오씨는 독일에 유학 중이던 1985년 북한요원의 말에 속아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으나 북한의 실상을 확인하자 이듬해 혼자 탈출했던 인물이다.

 오씨는 이날 ‘열린북한방송’ 권은경 국제팀장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를 찾아가 직원에게 편지를 직접 전달하려 했으나 대표부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자 우편함에 편지를 투입하고 돌아왔다고 밝혔다. 오씨는 수신자란에 김정은의 이름을 적었다.

 오씨는 편지에서 “70을 넘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은 바로 내 귀한 딸들과 부인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주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최근 2년 동안 전 세계가 내 가족의 안녕을 걱정하고 있다. 남한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 시점이 당신 부친이 저지른 죄악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김정은을 설득했다.

 편지를 전달한 뒤 오씨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강경화 부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거듭 호소했다. 이어 20차 유엔 인권이사회(UNHRC) 비정부기구(NGO) 회의에 참석해 북한의 강제구금 실태를 고발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석방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씨는 “북한이 내 가족들을 억류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한국 학생 2명을 납치하라는 (북한의) 지시를 거절하고 북한을 떠났기 때문”이라며 “내 가족을 구출하는 일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강제 구금된 북한 주민 20만 명의 목숨을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신씨와 두 딸을 송환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대해 4월 27일 “신씨는 간염으로 이미 사망했다”고 유엔 임의구금 실무그룹을 통해 통보했다. 당시 북한은 “두 딸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오씨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으며 오씨를 만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다”는 주장을 했었다.

 그러나 오씨는 “처가 사망했다면 북한의 주장대로 병사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이고, 두 딸이 나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내 딸들이 아직 북한 국가보위부(정보 기관)의 관리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경북 의성 출신인 오씨는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 가서 브레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신씨는 통영여중을 졸업한 뒤 20대에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로 일하다 오씨와 결혼했고 두 딸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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