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리 앤 아르노' 감정의 미스테리에 대한 기록

중앙일보

입력

프랑스, 1995.
감독 끌로드 소떼
출연 미셸 세로, 엠마누엘 베아르, 장 위그 앙글라드.

〈뱅상, 프랑수아, 폴, 그리고 다른 사람들〉(1974)에서 자신의 고질적인 이기심으로 인해 아내와 애인 모두에게 버림받은 중년 남자 뱅상은 '살다보면 떠났던 아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머슥하게 웃는다. 그리고 끌로드 소떼 감독은 이십 년이 지난 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넬리 앤 아르노〉(1995)에 와서야, 모호한 방식으로긴 하지만 여하튼, 뱅상의 그런 바램을 이루어준다. 당연하게도 아르노는 뱅상이나 감독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늙었다.

영화는 70대의 노신사 아르노(미셸 세로)와, 25세의 젊은 여자 넬리(엠마누엘 베아르)의 애정 관계를 다루고 있다. 전직 판사이자 냉혈 사업가였던 아르노는 아내와 20년간 별거 중이며, 출판사에서 감원된 후 빵집 점원부터 프리랜서 편집자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고 있는 넬리는 아르노를 만난 후 곧 남편에게 별거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넬리 앤 아르노〉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미스테리에 대한 정묘한 기록이다.
그것은 미스테리에 가까운 내부의 감정 변화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는데, 이 영화의 미덕은 감정의 편린들을 쌓아가는 그런 진중함에 있다. 감독은 연륜에서 나온 균형감으로 늙는다는 것에 대한 불안, 성급한 젊음에 대한 단상, 시기를 놓치면 곧 사라지고 마는 애정, 욕망과 억제 사이에서 번민하는 감정의 흔적 같은 것들에 대해 세심하게 진술한다.

끌로드 소떼는 중상층(upper middle class)의 여유롭지만 별 수없이 후줄근한 삶의 단면들을 소박하게 담는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프랑스 여피들의 삶을 비판 없이 용인하는 다소 안이한 태도 덕분에 덤으로 약간의 악명까지 얻고 있기도 하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들 중상층들은 때로 친구들끼리 모인 저녁 자리에서 빈민들을 교외로 내모는 프랑스의 도시정책에 대해 잠시 사소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영화 대부분은 돈 문제, 안락한 집, 삶의 질, 변화하는 관계와 심리 등 그들이 물적으로 심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애초의 관심에 전념한다.

아마도 끌로드 소떼 감독의 관심사 가운데 최대의 것은 애정 문제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내와 애인 중 누구와 살 것인가라는 질문. 그래서 끌로드 소떼 감독의 영화는 대개 외도에 의해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외도와 거의 동시적으로, 아내/남편에 대한 미련이 인물들의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내와 살든 애인과 살든 어쨌든 함께 살기 시작하면 서로의 현실과 직접 마주해야하는,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생활이 시작된다는 것은 공통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넬리 앤 아르노〉는 아르노가 넬리와의 관계가 좀더 진전될 수도 있을 그 순간에, 함께 살던 남자의 예기치 않은 죽음 때문에 그에게 잠시 들른 아내와 황망히 여행을 떠나버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서둘러 끝맺는다. 이 도저히 행복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알 듯 모를 듯 미진하게 끝나버리는 엔딩은 아내/남편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전작들에 대한 응답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미련과 바램을 이루어주는 소원 성취의 판타지라기 보다는, 얻을 수 있는 순간에 뒤로 물러서게 하는, 나쁘게 말하면 욕망이 실현된 후 찾아오는 각성의 고통스러움 대신 판타지가 빚어내는 아쉬움과 설레임 쪽을 택하는, 인간 감정의 어찌할 수 없는 유약함과 현명함과 비겁함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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