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된 감정으로 보여주는 여행 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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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길들인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책의 사진들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 지, 그냥 평범하다고 해야 할 지 머뭇거려지는 까닭에서입니다.

'청춘·길'(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이라는 제목을 한, 젊은 사내 둘의 담담한 기행일지가 담긴 사진집입니다.

여행은 말이 없을 때 여행답습니다. 문득 지나치게 되는 풍광을 그냥 느끼고 바라 볼 수 있을 때 그 여행에는 참 아름다움이 담깁니다. 굳이 어울리지도 않을 상념을 풍광에 연결시키고, 케케묵은 철학적 단상을 늘어놓는 따위는 오히려 여행의 참 멋을 퇴색시키지요. 자연 속에 파묻히지 못하고, 그저 대상으로 바라보기만 하려는 어쭙잖은 여행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요.

여행은 자연 속에, 혹은 낯선 풍광 속에 그냥 빠져들어야 훨씬 아릅답습니다. 거기에 특별한 까닭이란 게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과잉 노출은 오히려 자연과 풍광에 담긴 참 뜻을 떨어 버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여기 두 사내의 여행은 그런 뜻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행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진들 또한 담담함의 아름다움을 가집니다. 그게 바로 여행의 참 아름다움 아닐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커브 길을 하나 돌고, 언덕이 바다를 향해 갑작스레 기울어지는 내리막길을 지나고 나면 시작된다. 그 길은 해안을 따라 10킬로미터 정도 이어지며, 꼭 그만큼의 길이로 해변에서 언덕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길끝까지 달린다. 끝에서 길은 다시 해안에서 멀어졌다가, 여러 작은 밭들이 펼쳐지는 걸 보면서 모래언덕에 이르게 되고 그 뒤로 바다가 있다."(이 책 51쪽에서)

'바간에 내리면 습한 아시아 한가운데 위치한 미얀마 중심부임에도 불구하고 모로코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로 시작하는 이 책은 위에 든 글처럼 여행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자신들이 지나치고, 또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하자면 그저 풍광 속에 자연스럽게 빠져든 상황을 보여줄 뿐입니다. 두 나그네의 넉넉한 몸짓들이 눈앞에 그려질 듯합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알려진 지은이가 카메라를 두고 떠난 여행길에서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진 역시 작가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상태입니다. 파노라마로 촬영한 사진들은 그저 눈앞에 보이는 풍광을 보여줄 뿐입니다. 설명이거나 자신의 감상이 끼어들어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 흔한 사진 설명조차 없습니다. 이 정도의 풍광이라면 약간의 기교만으로라도 더 묘한 결과를 연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질박한 사진들입니다.

여정은 그 흔한 관광지가 아닙니다. 어쩌면 세계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달 수 있는 미얀마의 수도 바간, 말리의 수도 바마코 등으로 이어집니다. 카메라 없는 중년의 사진작가 포콩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 일회용 카메라를 빌려 사진을 찍습니다. 동행한 20살 아래의 청년 작가 포토스키는 포콩이 삶과 자연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동안 언어로, 문장으로 삶과 자연을 역시 지극히 담담한, 그래서 더 아름답게 담아냅니다.

"말리 횡단은 도무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 여행은 오후에 시작되어 이튿날에야 끝날 것이다. 메마르고 밋밋한 평원이 길게 이어진다. 덤불 숲 너머로 보이는 것은 드문드문 눈에 띄는 바오밥나무 몇 그루와 도로변의 마을들 뿐이다."(이 책 92쪽에서)

포토스키의 글은 사진에 대한 설명이나 부연이 아닙니다. 포콩이 사진을 찍는 그 자리에서 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냥 묘사할 뿐입니다. 포콩의 사진이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포토스키 역시 감정 또한 최대한 절제돼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마치 하나의 인생 나그네인 것처럼 글과 사진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닮아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풍경을 느끼지 못한다. 예전과 똑같은 감수성은 지니고 있지만 이젠 울지 못할 것이고 전율하지도 않는다. 욕구불만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중략) 무척 아름답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며 또 보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이제는 오직 몸 뿐이다. 그것이 모든 걸 앗아가 버렸다."(이 책 120쪽에서)

얼치기 여행가라면 이 책이 끝 무렵인 이 즈음에서 풍경에 도취해 억지 감동을 풀어낼 법도 합니다. 그러나 포토스키는 자신의 느낌 그대로 욕망 뿐인 몸, 그것 때문에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고 풀어놓습니다.

이제 우리도 모든 허울을 벗어던지고 떨쳐 일어나 그냥 아무데로나 떠나야 할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가식 없이 자연 속에, 풍광 속에, 그리고 그 안 깊숙이에 담긴 삶의 역사 속으로 그냥 묻혀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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