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중국 불교 대표단의 무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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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신준봉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남해의 아름다운 도시 여수에서는 지금 엑스포만 열리고 있는 게 아니다. 국제불교대회인 ‘세계불교도 우의회(WFB·The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도 열리고 있다. 전 세계 불교 지도자들이 국제사회를 위해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1950년 스리랑카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서 깊은 대회다.

 1990년에 이어 22년 만에 반가운 ‘이국 손님’들을 맞게 된 한국 불교계는 부지런을 떨었다. 여수 엑스포를 통해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건 기본.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승려들의 활약상을 그린 창작 뮤지컬 ‘카르마의 노래’를 제작하는 등 한국의 두터운 불교문화를 보여주겠다고 별렀다. 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은 진옥 스님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40개국 참가자 1000명, 국내외 불자 10만 명을 맞는 대회 준비에 이상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사단이 벌어진 건 12일 오전. WFB 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로 돼 있던 중국 측 대표단이 돌연 대회를 보이콧하겠다고 했다. 티베트 대표단과 함께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티베트에서는 이번에 모두 다섯 명이 한국을 찾았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총리를 지냈고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삼동 린포체(환생한 스님), 종교문화성 장관인 페마 친초르 등이다. 페마 친초르에 따르면 중국 대표단이 뒤늦게 회의장에 나타난 직후 WFB 본부 관계자가 다가와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고 했다. 그는 중국 측의 요구임을 직감했지만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일단 자리를 피했다.

 중국 대표단은 이날 오후 6시 개막식 행사에서 또다시 까탈을 부렸다. 재차 티베트 참가자들의 퇴장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자신들이 개막식장을 떠났다. 그러고는 13일 돌연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대표단을 17명이나 보내놓고 ‘정치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둘러 귀국한 것이다.

 티베트 참가자들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삼동 린포체는 예정된 강연을 위해 경주로 떠나는 등 정해진 한국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하지만 속내가 편안한 건 물론 아니다. 친초르 장관은 “중국인들이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진옥 스님은 “우의를 다지러 온 사람들이 막무가내식 요구를 하더니 중재할 여지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고 허탈해했다.

 중국은 최근 몇 년 새 불교계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 자유가 없는 인민을 하나로 묶을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안에서는 성공적일지 모르겠으나 바깥에서 중국 불교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종교단체로 비치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오랜 화두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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