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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그는 왜 떳떳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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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습관은 무섭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지난주 육사 생도들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올렸을 때 그 행동은 조건반사에 가까웠을 것이다. 군인으로, 대통령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살아온 그였다. ‘학습을 통해 특정한 자극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전씨의 대뇌피질은 자신의 주인을 러시아 생리학자 파블로프의 세계로 초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전씨를 육사 퍼레이드 행사에 부른 게 문제였다.

 그러나 내가 의문을 품은 건 전씨의 습관이 대통령 퇴임 후 24년이 지나도록 교정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전씨는 반란수괴 같은 엄청난 죄목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추징금 2205억원 중 1670억원도 미납인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여러 행사에 5공 시절의 자태로 측근들을 이끌고 다닌다. 그가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그에게서 진심어린 사과를 받을 수 있었던 기회는 적어도 두 번 있었다. 우선 12·12 및 5·18 고소고발 사건에 대한 1차 수사 때다. 1995년 7월 서울지검 공안1부는 5·18 광주민주화항쟁 무력진압 관련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한다. 당시 내세운 논리가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였다. 만약 검찰이 이때 기소했다면 전씨가 당당함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수사에 맞설 명분이 부족했다.

 두 번째 기회는 95년 11월 5·18 불기소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었다. 헌재는 “불기소는 잘못으로 취소돼야 한다”고 선고할 방침이었다. 김영삼(YS) 대통령은 헌재 결정을 엿새 앞둔 시점에 전격적으로 ‘5·18 특별법 제정’ 카드를 꺼내든다.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씨가 구속된 뒤 ‘역사 바로 세우기’ 선언을 검토하던 상황이었다. 헌재 결정으로 결단의 빛이 바랠 것으로 예상되자 먼저 치고나간 것이다. 헌재에선 “불기소 취소 결정에 따라 전·노씨를 처벌하는 절차를 밟았다면 정치적 논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대통령이 헌재 결정을 새치기했다는 논란이 일고 “처벌할 수 없다”가 넉 달 만에 “있다”로 바뀌면서 법치(法治)의 원칙은 무너졌다. 그 결과 전씨에겐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할 공간이 생겼다. 며칠 뒤 전씨는 연희동 자택에서 나와 ‘골목성명’을 읽어 내려간다.

 “제가 범죄자라면 내란 세력과 야합해 온 김 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곧장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합천 선영으로 향한다. 다음 날 새벽 서울로 압송돼 온 그는 진술을 거부하며 단식에 들어간다. 검찰 수사는 범죄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정치적 탄압일 뿐이라는 1인 시위였다. 그는 측근들이 검찰을 비난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 다 (YS가) 시켜서 하는 건데….”

 항소심 재판장(권성 현 언론중재위원장)이 “항장불살(降將不殺·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이라며 전씨의 형량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해줬지만 실지론 ‘항장’이 아니었다. 쪽 대본으로 ‘감독 청와대, 주연 검찰’의 드라마를 찍는 사이 전씨는 억울하게 당했다는 알리바이를 거머쥔 셈이다. 물론 그 기회들을 살렸다고 해도 전씨가 반성했을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국민 앞에서 공개 활동을 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이후에도 정권이 바뀌고 정치의 풍향계가 돌면 수사 결론이 흔들리는 일이 반복돼 왔다. 여의도의 ‘작은 전두환’ ‘작은 노태우’들은 “정치적 수사”라며 희생양의 가면을 썼다. 사면을 받은 다음엔 곧바로 정치판에 얼굴을 내밀었다. 굴절된 정의는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관은 무섭다. 지금 불기소되는 사건들은 다시 엎어지고 뒤집힐 가능성이 없을까. 청와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던 습관에서, 정치적 판단에 따라 칼을 만지작거리던 관성에서 검찰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처벌받지만 떳떳하다’는 역설이 계속되는 한 한국 정치와 검찰의 모든 것은 파블로프 이론으로 설명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