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21세기는 분자의 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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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듯이 원자도 화학결합을 이뤄야 국화도 소쩍새도 만들 수 있다.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들은 원자를 만들기 위해 있고, 원자는 분자를 만들어서 세포활동을 하기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태양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별들 표면의 높은 온도에서는 원자는 결합을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개개의 원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생명이 약동하는 지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대부분 원자는 하나하나씩 따로 존재하지 않고 여러 개가 결합을 이뤄 분자로 존재한다.

푸른 행성 지구가 태양계의 유일한 오아시스를 제공하는 것도 수소원자 두개와 산소원자 한개가 결합해 물이라는 분자를 만들기 때문이고, 우리가 공기를 마음 놓고 호흡할 수 있는 이유도 높은 화학적 활성을 가진 산소원자 두개가 결합해 안정한 산소분자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백종류의 원자가 따로 있다면 물질의 종류는 1백가지에 그치겠지만 분자를 만들면 엄청난 다양성이 생겨나고, 이러한 물질의 다양성 때문에 생명도 물질문명도, 심지어는 뇌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앞으로 분자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최근 스웨덴의 왕립공학원에서 내놓은 미래과학 발전 계통도를 보면 정보통신.화학.재료과학이 생물공학에 기반기술을 제공해 식품 의약품, 새로운 살충제, 바이오 센서, 신소재와 환경화합물, 비료, 생물연료, 미래 컴퓨터 등 분야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돼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21세기의 과학이 수확할 열매 중에서 분자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생명체는 분자로 이뤄졌다. 그렇지 않고 원자들이 따로 논다면 우리의 몸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식품이나 의약품 같은 물질도 거의 모두 분자다. 생체 반응에 기초를 둔 생명공학의 산물 역시 모두 분자로 이뤄졌다.

최근 벼의 유전체(유전정보의 총체) 가 완전히 해독됐다는 발표가 있었다.농작물의 유전정보를 제대로 이해하면 병충해에 강한 작물로부터 뛰어난 기능성을 가진 식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어제는 인간 유전체에 들어 있는 32억개 염기서열의 99%를 망라하는 유전자 지도가 발표됐다.

3만~4만개로 추정되는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3만~4만가지 단백질 분자의 구조와 기능이 밝혀지면 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을 합리적으로 고안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살충제를 구태여 든 것은 해충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살충제를 사용해 해충에 의한 작물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생산량을 늘리는 것보다 효과적인 식량문제 해결방안이기 때문이다.

값싸고 간편하게 건강상태와 질병 유무를 가려낼 수 있는 바이오센서 역시 분자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생분자로 이뤄진 신소재는 쉽게 분해되기 때문에 환경친화적이다.

광합성 식물이 생산해 내는 녹말을 값싸게 알콜 같은 연료로 바꿀 수 있으면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화석 연료의 고갈에 대한 걱정이 덜어질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미래의 컴퓨터가 언급된 이유는 무얼까? 사실 따지고 보면 20개 정도의 원자가 결합한 염기라는 간단한 분자를 알파벳으로 사용해서 엄청난 유전정보를 기록하고 프로세스하는 세포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컴퓨터를 능가하는 정보처리 장치다.

따라서 인간이 DNA 분자와 효소 단백질 분자를 기초로 하는 세포의 작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흉내낼 수 있다면 바이오칩을 바탕으로 하는 미래의 컴퓨터를 꿈꿀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식량문제.보건복지.환경. 정보화 등 21세기에 우리 삶의 외부적 조건을 규정할 대부분의 문제에는 원자들로 구성된 분자가 직접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는 원자의 세기인 20세기에 쌓아올린 원자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기반으로 분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분자의 세기가 될 것이다. 분자의 세기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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