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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미 박람회장 지하 부스 ‘찬밥’… 이젠 짝퉁 걱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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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충남 천안시 두정동 벨금속공업 손톱깎이 공장에서 여직원이 손잡이 장식 작업을 막 마친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조용철 기자

1970년대 중반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하드웨어 박람회’로 그는 기억했다. 손톱깎이 제품을 들고 처음 참가 신청서를 냈는데 햇빛을 볼 수 없는 지하 부스를 배정받았다. “코리아(Korea)라는 나라 이름조차 생소해 하던 시절이었다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바이어 얼굴 몇 번 못 보니까 솔직히 서운했어요. 어쩌다 들르는 사람들은 일본 업체냐고 물었지요.”

25일 오전 충남 천안시 두정동의 벨금속공업 사업장에서 만난 이희평(69) 회장의 회고다. 그는 불현듯 사무실 서랍에서 작은 제품 상자 서너 개를 꺼내왔다. 벨금속 손톱깎이와 중국산 모조품이 함께 담긴 상자들이었다. 상자를 열자 ‘BELL’ 로고가 새겨진 손톱깎이 10여 개가 가지런했다. “진짜·가짜를 한 번 식별해 보라”는 요청에 열심히 들여다 봤지만 힘들었다. “날 부분을 자세히 보면 중국산은 좀 무뎌요. 손잡이 부분 접합 상태도 약간 엉성하고요. 가장 확실한 건 한 번 깎아보면 됩니다.”

이어 같은 날 오후 찾아간 천안시 직산읍 마정산업단지 내 쓰리쎄븐 공장. 둥글게 말린 은빛 강판이 육중한 금형기를 통과하면 “쿵, 쿵, 쿵” 소리와 함께 손톱깎이 손잡이가 줄줄이 쏟아졌다. 옆에서는 손톱깎이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접합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품들은 열처리와 조립 과정을 거쳐 손톱깎이 모양을 갖춰 간다. 다음은 연삭공정. 연삭기를 통과하는 손톱깎이 끝에서는 노란 불꽃이 튀었다. 손톱깎이의 생명 ‘날’ 에 절삭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후 도금ㆍ세척ㆍ검수ㆍ포장을 거치면 시장에 나갈 준비 끝. 박도범 생산업무부장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공정이 없지만 열처리와 연삭 기능은 손톱깎이의 핵심 공정”이라고 말했다. 손톱깎이를 눈으로 보면 윗날·아랫날이 정확히 맞물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윗날이 0.02㎜가량 길다, 이것 역시 품질을 결정짓는 중요포인트다. 손톱을 부드럽게, 거칠지 않게 깎을 수 있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시카코 박람회장 지하에서 “이 물건 믿을 수 있겠느냐”고 설움 받던 한국산 손톱깎이는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모조품을 걱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손톱깎이는 금속가공기술의 정수다. 수만 번 동작에도 탄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날은 닳지 않아야 한다. 정교하면서도 높은 경도를 유지해야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제품은 분실하기 전에는 반영구적이다. 우리나라도 불과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손톱을 뜯어내는 수준의 불량 손톱깎이가 흔했다. 이후 포스코 등에서 고품질의 강재를 공급받고 제조기술이 향상되면서 오늘날 세계 최고에 이르렀다. 각각 매출 250억원과 100억원 수준의 쓰리쎄븐과 벨금속공업이 대표주자다. 물론 제조 강국 독일·일본도 손톱깎이를 만든다. 고급품 시장에서는 일정한 몫이 있지만 우리처럼 대량 생산하는 업체는 드물다. 미국 바세트사의 ‘트림(Trim)’ 손톱깎이가 유명하지만 직접 생산하지 않고 주로 중국 등에 외주를 준다. 2000년 초까지만 해도 국내 업체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80% 수준이었는데 점차 중국산에 잠식 당해 50% 수준으로 추정된다.

중국산 제품에 맞서기 위해 국내 업체들이 주력하는 건 고급화다. 기능별로 제품을 다양화하고 세트 제품의 비중을 늘린다. 노인용ㆍ유아용ㆍ기형 발톱용 제품에서 은나노 항균 처리 제품까지 다양하다. 날 부분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손톱깎이도 출시할 예정이다. 귀이개ㆍ족집게·손질도구에 손톱용 화장품까지 하나의 세트에 넣어 판다. 손톱깎이 낱개 가격은 1000~3000원이 보통이지만 괜찮은 세트 제품은 2만원 안팎이다. 아주 좋은 건 5만원도 넘는다.

모조품 방지는 요즘 힘을 부쩍 쏟는 분야다. 쓰리쎄븐은 지난해 한국조폐공사에서 ‘다방향 잠상주화 제조법’이라는 기술을 도입해 손톱깎이에 적용했다. 주화에 적용하던 고난도 기술이다. 손톱깎이 몸체에 새겨진 ‘777’ 글자를 살짝 옆으로 돌려 보면 태극문양으로 변해 진품임을 증명한다.

세계 중저가 생활용품 시장에서 손톱깎이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우리 브랜드가 적잖다. 국내 밀폐용기 업계 ‘빅2’인 락앤락과 삼광유리가 대표적이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ㆍ동남아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다. 락앤락은 지난 해 ‘중국 히트상품 베스트 25’에서 6위에 오르기도 했다. 태양산업과 대륙제관은 휴대용 부탄가스 시장의 강자다. 국내 시장뿐 아니라 미국ㆍ호주ㆍ중국 등 60여 개국에 수출된다.

에프에스코리아는 화장솜·화장솔 같은 화장품 도구의 선두주자다. 유니더스는 국내 콘돔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하며 20여 개국에 수출한다. 코메론의 줄자도 지명도가 있다. 저가 중국산 줄자를 제외하면 국내 줄자 시장을 거의 독점했다. 이런 상품 대부분은 정부에 의해 ‘세계 일류상품’으로 지정돼 소정의 지원을 받는다. 세계 시장점유율이 5위 안에 들어가면 ‘일류상품’, 5년 안에 5위권에 진입이 가능할 듯하면 ‘차세대 일류 상품’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손톱깎이 역시 ‘세계 일류 상품’이다. 지식경제부 신동준 무역진흥과장은 “일류 상품 제조업체의 경우 우리 중소업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브랜드 경쟁력 지원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온라인 마케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마케팅에 대한 지원도 늘린다.

정부 공인을 받지 못했지만 아직도 중국산 홍수에 꿋꿋하게 버티는 저가 국산 생활용품이 적잖다. 23일 서울 도곡동 다이소 ‘천원샵’ 매장에 가 봤더니 ‘미끄럼 방지용 스티커’ ‘샤워타월’ ‘물병’ 등 상당수가 한국산이었다. 이 회사 안웅걸 이사는 “양질의 제품을 중국산처럼 저렴한 가격에 맞출 수 있는 국내사업장이 생각보다 많다”고 전했다. 매장 제품 구성의 49%가 한국산이고 중국산은 38%다. 나머지는 베트남ㆍ태국ㆍ인도 등지 생산품이다. 대한상의의 박종갑 조사2본부장은 “중저가 생활용품 제조업체는 대부분 영세하지만 일자리 창출과 동반성장 차원에서 그 저변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천안=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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