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대일외교 노선과 결별" 아사히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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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를 모르겠다" "감정적인 표현이 많은게 북한과 똑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강력한 대일 비판에 대해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무척 당황하고 있다.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일단 말을 아끼면서 '냉정한 대처'를 강조한 가운데 진의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불쾌감과 반발의 기운도 감지되고 있다.

◇냉정대처 강조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 등 외교현안에 대해 "대립하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를 극복한 실적과 지혜가 일본 정부와 일본인에게 있음을 상대국도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일시적 대립과 이견에 얽매이거나, 정체상태에 빠졌다는 느낌은 없다"고 답했다.

그는 "미래지향적으로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시켜간다는데 서로 흔들림이 없다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다카시마 하쓰히사 외무성 대변인도 기자들에게 "당국자들이 정밀분석중이며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미래를 향해 화해의 정신으로 마음속에 맺힌 것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냉정대처를 강조했다.

그는 2차대전 중 한국인 징용자 유골을 조사해 돌려달라는 한국측의 요구에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입장도 밝혀, '한국 달래기'를 위한 일본 정부의 물밑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공식적으로 냉정대처를 강조하며 말을 아끼고 있으나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일본측을 강력히 '나무란 데' 대해 불쾌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집권 자민당의 나카타니 겐 전 방위청장관은 '일본은 자위대 해외파병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젠 재군비 논의를 활발히 진행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고통스런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을 비판했다.

그는 "자위대는 해외에서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를 재군비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비판을 끌어올려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충분히 숙고해달라"며 반발했다.

야당인 민주당의 니시무라 신고 중의원 의원도 "지금까지 쌓아온 한.일관계를 시궁창에 버리는 것 같은 담화"라며 "이대로라면 북한이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여론에 좌우되기 쉬운 대통령의 취약함이 드러났다"며 "감정적인 표현이 많은게 북한과 똑같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외무성의 한 간부는 "말문이 막힌다"며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일 정부의 속내 = 일본 정부는 한.일관계 악화가 장기화될 경우 외교적으로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판단에 우려를 갖고 있다.

일본 정부는 북핵 6자회담의 재개와 일본인 납치사건 등의 해법 마련을 위해서는 한국 정부와의 공조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 '외교 숙원'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있어서도 중국과 한국 등 주변국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할 형편이다.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이 이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왔을 것이라는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당초 한국 정부의 대일비판을 '국내용'으로 치부했다가 사태가 걷잡을 수 확산된 것에 대한 자책도 외무성 내에서 나오고 있다고 외교소식통들은 전했다.

◇일본 언론 "한일관계 앞날 불투명"= 일본 언론은 노 대통령이 일본 정부를 강력히 비판한 것에 대해 "지금까지의 조용한 대일 외교노선과 결별을 선언했다"며 한.일관계의 앞날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요지로 해설을 곁들여 24일 주요기사로 보도했다.

아사히 신문은 "노 대통령이 내놓은 담화는 취임 이래 2년여에 걸친 '조용한 미래지향적 외교와의 결별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며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등 '3점 세트'를 양국 관계의 장애물로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 배경에 대해 이 신문은 다음달로 예정된 한국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역사 바로세우기' 등의 정치일정을 앞두고 여론이 납득하기 쉬운 역사마찰을 거론, 선수를 쳤다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신문은 "노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립자세를 보인 만큼 올 상반기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은 현재로서 전망하기 어렵다"며 "한국 정부에도 이번의 '분노' 이상의 구체 대책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교착상태가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대통령이 대일 외교를 주도하는 형국으로 발전하는 등 한국 정부의 대응이 한층 경직화되고 있다"며 "북핵 6자회담의 조기재개 등 양국 협력과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신문은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문제로 한국 정부가 일본을 강력히 비판한 것에 대해 "일본측이 '정권기반이 약한 노 정권의 국내용 반응'으로 치부했다는 사실이 한국 정부의 귀에 들어간 뒤 한국측의 태도가 경직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문은 한국 외교통상부 간부도 노 대통령의 담화발표 경위를 문의한 일본 외무성 관계자에게 "사전에 전혀 협의받지 못했다"고 해명했다고 전하면서 한국 외교통상부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노 대통령이 '통렬히' 일본 비판을 전개한 것은 반일 일색으로 물든 여론을 등에 업고 자신의 정치 스타일인 '정면돌파' 수법으로 일본 정부의 대응을 이끌어내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신문은 "노 대통령의 강경발언이 성과는 얻지 못한 채 국내 경제가 타격을 받는 사태로 진전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어 한국 안에서는 신중한 대처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공영방송 NHK는 "노 대통령의 담화가 국민들을 상대로 인터넷상에서 공표된 만큼 어디까지나 국내용 메시지이며 따라서 즉각 반응하지 말고 진의를 살펴야한다는 의견이 일본 정부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디지털뉴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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