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내쳤더니 중국이 호시탐탐 … 필리핀 뒤늦은 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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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24일 필리핀 수비크만 해군기지에서 미 해병대 장병들이 성조기(왼쪽)를 내리고 있는 한편 필리핀 군인들은 자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당시 미군은 필리핀 의회에서 미군 주둔협정 연장 법안이 부결되면서 수비크·클라크 기지에서 철수했다. [사진 미 해병대]

지난달 22일 남중국해 연안의 필리핀 팔라완섬에서 미국·필리핀 합동군사훈련 기자회견이 열렸다. “남중국해는 미·필리핀 상호 방위협약에 포함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필리핀군 사반 서부군사령관은 “협약에 따라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가 침략받을 경우 대응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남중국해에서 유사시 미군이 관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달 30일 워싱턴에선 미·필리핀 외무·국방장관의 첫 2+2회담이 열렸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내년도 군사지원을 전년 대비 두 배인 3000만 달러(약 300억원)로 늘리기로 했다.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은 남중국해를 감시하는 미국의 정찰위성 정보를 24시간 태세로 필리핀 측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2+2회담은 3일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 직전에 이뤄진 것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조치로 해석됐다.

 필리핀이 미국의 군사지원을 요청하게 된 이유는 중국과의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黃巖島) 분쟁 때문이다. 양국 선박이 스카버러섬을 둘러싸고 한 달 넘게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자국민의 필리핀 여행을 중단시키는 등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필리핀은 스카버러섬이 자국의 루손섬에서 불과 230㎞ 떨어져 배타적경제수역(EEZ·320㎞)에 포함되기 때문에 중국과의 분쟁에서 물러설 수 없는 처지다. 외교안보의 축을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기는 미국으로선 필리핀 지원이 불가결하다. 중국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양국의 군사 협력관계는 예전 같지 않다. 한때 아시아에서 미국의 유일한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20년 전만 하더라도 태평양 내 최대 미군기지였다. 베트남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원기지였던 수비크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는 미군의 최대 해외 거점이었다. 그러나 1992년 필리핀 의회의 미군 주둔협정 연장 법안 부결로 수비크·클라크 기지에서 미군은 철수했다. 필리핀에서의 미군 철수가 중국의 위협을 불렀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미군 철수 후 필리핀 군사력은 약화됐다. 필리핀 해군은 아직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들여온 함선을 운용하고 있다.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함정은 물론 제대로 된 전투기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최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중국군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의 위협이 현실화하자 필리핀이 다시 미국에 손짓하는 모양새가 됐다.

 필리핀 내 뿌리 깊은 반미 여론은 양국의 협력을 제한하는 요소다. 양국 정부는 미군의 수비크만에서의 활동을 논의하고 있지만 필리핀 내 반미 여론에 밀려 예전과 같은 병력 주둔은 검토 단계에서 제외됐다. 다만 미군이 수비크만의 필리핀 군사시설을 이용하는 ‘전략적 협력’ 형태를 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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