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에 자리넘긴 정문술 미래산업 전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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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술(鄭文述 ·63) 미래산업 전 사장은 지난 4일 “나는 돈에 한이 맺힌 사람이지만 이제는 돈을 버는 일은 그만두고 돈을 쓰는 일을 하겠다”며 사장 자리를 전문경영인에 넘겼다.

미래산업의 창업주 이자 오너인 그는 수년 전부터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언해왔는데,그 약속을 지킨 셈이다. 鄭 전사장은 경영진의 간청에 못이겨 비상근 상담역을 맡았지만 ‘배후 조종’식의 경영 간섭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의 자발적 퇴진은 아직 오너중심 경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과연 제대로 지켜질 것 이냐는 의혹도 받고 있다. 사장실이라거나 상담역실이라는 문패가 없는 서울 강남 미래산업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사장자리에서 벗어 나니까 홀가분 한가.
“수년 전부터 결재를 안 해 넘겨 줄 서류는 별로 없었다.법인카드와 회사소유의 골프장회원권 몇 장을 넘겨준 게 고작이다. 이제 쉬면서 돈을 값지게 쓰는 사업만 할 것이다.단순한 자선이 아니고 도움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 모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생산적인 자선을 생각하고 있다.그 방법론을 연구 중인데 간단치 않다.”

-사퇴 전후로 여러 생각이 났을 텐데.
“막상 결심하니까 놓기가 싫어졌다.임시 이사회를 소집하고서도 망설였다.이사직은 유지할까,명예회장으로 남으면 어떨까 등 별별 생각이 다 났다.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경영권을 던져 버린 것이다.”

-연초를 택해 사임한 이유는.
“지난해 말 결심했다.회사 주가는 형편없이 떨어져 더 이상 떨어질 것도 없는 수준이다.그러나 올 회사 경영전망은 밝다.칩 마운터 수출이 늘어나 누가 사장이되도 지난해 보다 나은 경영실적을 올릴 수 있고,주가도 오를 것으로 본다.후임자에게 부담을 덜어 주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가족들이 동의했나.
“사퇴발표 하루 전 서울 강남의 한 호텔로 두 아들을 불러 점심을 함께 하면서 나의 뜻을 말했더니 흔쾌히 받아 들였다.경영권 보다도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지 않았느냐는 큰아들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집사람은 하룻동안 식음을 끊었지만,나의 퇴진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경영권을 물려받지 못하는 아들들 것정 때문이라고 했다.”

-비상근 상담역으로 물러 났지만 여전히 대주주 아닌가.
“나는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그런데 임원들이 시장에 주는 충격이 크니까 상담역이라도 맡아 달라고 졸라 이를 수락했다.그것도 비상근을 고집했다. 사장 퇴임직후 기흥 종합연구센터 건립팀장이 설계도면을 가져와 물어 보길래 혼을 내고 돌려 보냈다.새 경영진과 협의하라고 했다.”

-경영 철학은 어떤 것인가.
“최고경영자는 감독이 아니라 코치이다.선수들이 잘 뛸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아프면 치료해주는 역할이다.또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으면 조직이 따르지 않는다.본(本)을 보여야한다는 얘기다. 나는 사장으로 있을 때 친인척을 한명도 쓰지 않았다.내가 어려울 때 처남의 집을 잡혀 돈을 얻어 쓰기도 했는데,처남이 아들을 취직시켜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배운 ‘바른 생활’대로만 경영을 하면 된다.정직한 경영이 결국 승리한다.그런 ‘경영 유전자’를 물려주고 떠났다고 자부하고 있다.”

-후임 경영진에게 어떤 당부를 했나.
“인사를 공평무사하게 하라고 훈수했다.또 국제경쟁력을 갖추려면 원가와 생산관리를 철저히 해야한다고 말했다.이 두 가지가 전부다.”

-국내외 경쟁기업들이 창업자가 떠난 틈을 타서 미래산업을 적대적인 방식으로 인수 합병(M&A)하려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래산업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일종의 국민기업으로 자랐다.만약 그런 시도가 있다면 과거 한글과 컴퓨터사를 인수하려는 외국기업의 시도를 여러 개인과 단체들이 나서서 막았듯 막아줄 것으로 믿는다.내가 지분을 계속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돈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빚에 쫓겨 가족동반 자살을 꾀하기도 했다.돈의 노예가 되니까 바른 생활을 할수 없었다.사재의 사회환원사업을 하려는 것도 이젠 돈을 컨트롤해보자는 뜻이다. 그러면 돈이 나의 충직한 부하가 될 것이다. 대신 돈을 정승처럼 쓰는 모형을 만들 것이다. 사회가 나를 이 만큼의 부자로 만들어줬으니 이제 보답 할 차례이다.”

-사재는 얼마나 되나.
“미래산업 주식이 대부분이다.최근의 시세로 따져도 수 백억원은 된다. 생활비로 쓸 돈도 충분하다.계산은 안 했지만 배당금 등으로 모은 돈이 수십억원은 될 것이다. 서울 서초구 원지동에 채마밭까지 쳐서 2천평가량 되는 집에 지난 79년부터 살고 있는데, 내가 정성을 들여 지은 집이어서 가장 아끼는 재산이다.”

-미래산업은 여러 자회사를 두고 있고 매출액도 1천억원이 넘어 이젠 벤처기업으로 보기엔 덩치가 너무 크다.
“법률상 이젠 대기업 축에 든다. 새 경영진이 나의 경영철학을 이해하고 있다면 한국에서 새로운 대기업 상을 만들어 낼 것으로 확신한다.

-‘벤처업계의 맏형’ 소리를 들어왔는데, 요즘 고전중인 벤처기업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주고 싶은가.
“벤처기업은 아직 덜 맞았다.더 고생해야한다. 벤처는 태생적으로 어려운 것이다.어렵다,어렵다 하지만 벤처기업 하기가 요즘처럼 좋은 적이 있었는가. 지금이 오히려 옥석을 가릴 좋은 기회다. 벤처기업인들 가운데 몇년 몇월까지 코스닥에 등록하겠다는 사업계획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았다.이건 사업을 거꾸로 하는 것이다.사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더 버릴 것이 있다면.
“명예욕이다.경영권도 하나의 권력이다.우리 사회는 체면 때문에 못하는 일이 너무 많다.나이가 들 수록 노욕(老慾)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게 걱정이다.”

-혹시 정치를 할 생각은 없나.
“절대로 안 한다.대통령을 시켜준다 해도 안 한다.나는 한때 민주화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조금씩 지원한 적이 있다.그들 중에는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지만 지금은 이들과 만나지 않는다.국회의원이 보내는 갖가지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넣어 버린다.후원회도 일절 가지 않는다.”

-소영웅주의적인 결단이란 지적도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주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니냐.사회가 아직도 뒤집어져 있다.향(香)을 지니고 있으면 일부러 향기를 낼 필요가 없다.”

-배순훈 전 정보통신장관을 영입해 자회사인 마래온라인의 최고경영자로 앉혔다가 지난해 8월 결별한 배경은.
“裵 전 장관은 내가 직접 영입한 것은 아니고 천거를 받았다.나는 최대한 예우를 했고 실제 미래온라인의 경영권을 넘겨 줄 의향이었다. 하지만 裵 전장관이 경영을 직접 맡겠다는 약속과 달리 오래전에 대우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을 데려다 경영을 맡기고 미래산업 계열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경영까지 맡아 중역들과 자주 마찰이 빚어졌다.모기업인 미래산업의 지분율을 50%로 유지해달라는 약속도 깨고 회사의 소유권까지 넘봐 모양이 좋지 않게 헤어졌다.”

-경영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가.
“사장을 그만두고도 여전히 일과처럼 계속하는 일이 일간신문 15개지를 샅샅히 다 읽는 것이다.거기서 경제 흐름의 징조를 파악한다.경영자는 한발 빨리 이를 간파해 임직원들에게 경고음을 발동할 줄 알아야한다. 지난해 2월 벤처거품론이 고개를 내밀자 곧바로 자회사들에게 투자유치를 서두르라고 지시했고 그게 적중했다."

-가장 존경하는 경영인은.
“나보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을 가장 아끼고 존경한다.그는 진정한 벤처기업가이고,돈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다.”

-두 아들에겐 무엇을 해줄 것인가.
“두 아들이 모두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공부는 원하는 만큼 시켜 줄 것이고,번듯한 집 한 채씩은 장만해줄 것이다.그것 뿐이다.”

대담=손병수 산업부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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