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메이저리그의 개척자 윌리 메이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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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결코 이 세상에 영웅이 끊기는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1951년 야구 역사상 위대한 선수 중의 한 명인 조 디마지오가 야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그 때 윌리 메이즈라는 또 다른 영웅이 야구장을 찾게 되었다.

"전 역사를 만들지 않습니다. 전 단지 플라이볼을 잡을 뿐입니다."

실제로 메이즈는 둘 다 했다. 메이즈가 1951년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했을 때 흑인 선수들은 여전히 메이저리그에 극소수에 불과했다. 메이즈가 나타나기 이전에 재능있는 흑인 선수에 대한 야구 스카우트의 전형적인 보고서는 그 선수의 피부색을 처음으로 언급했고, 그의 능력은 다음이었다. 스카우트들이 젊은 메이즈를 묘사했을 때 그들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먼저 언급했다.

22시즌 동안 메이즈는 그의 타력, 주루와 탁월한 수비력으로 팬들과 동료선수들을 놀라게 만들었다.스포츠 기자인 아더 데일리가 표현한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그것을 더 잘 할수 있었다. 그것도 즐거운 우아함과 함께.

1950년대와 60년대에 팬들은 메이즈의 모든 재능을 볼 수 없었다.그의 명성과 인기가 한창일 때에 그는 할렘에 있는 그의 하숙집 앞에 모인 존경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스틱볼 놀이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곤 하였다.

팬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많은 눈부신 수비중에서 어느 것이 최고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모든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메이즈가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이다.

1931년 5월 6일 메이즈는 세상에 태어났다.

메이즈가 알라바마의 웨스트필드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을 때 빈터에서 야구를 즐기는 그 어린 소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선수가 될 거라는 것을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생각했었던 한 사람은 바로 메이즈의 아버지였다.

메이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다 운동선수였다. 메이즈의 아버지는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격리된 남부의 전부 흑인인 팀들에서 야구를 했다. 메이즈의 어머니는 그녀의 학교에서 최고의 단거리 육상선수였었다.

메이즈가 성장해 가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제강 공장에서 일을 했고, 그 공장이 후원하는 세미프로팀에서 뛰었다.그는 심지어 메이즈가 걸을 수 있기 전부터 메이즈에게 공잡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4살이 되던 해에 메이즈는 그 철강팀에서 아버지와 같이 뛰게 되었다. 그의 고등학교는 야구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농구나 축구를 즐겼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끝마치기 전에 야구가 그의 직업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메이즈는 격리된 니그로 남부리그에 있는 버밍햄 블랙 배런즈에서 뛰면서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그 때 그의 나이는 16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야구선수가 되고자 하는 윌리의 야심을 열렬하게 후원했지만 그는 또한 그의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를 고집하였다.

배런즈에서의 그의 첫 해에 윌리는 학교를 빠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홈경기만 출장하게 되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 그는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하였다. 자이언츠는 우선 메이즈를 뉴저지 트렌튼에 있는 그들의 더블 A 마이너리그 팀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트리플 A 마이너리그 팀인 미니애폴리스 밀러스로 승격되었다.그는 51년에 불과 20살이었고, 그 때 그는 뉴욕시에 있는 폴로 그라운드에 있는 자이언츠에 합류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메이즈는 그의 첫 12번의 타석에서 안타없이 물러남으로써 메이저리그에서 불안한 출발을 시작했다. 다른 단장들 같으면 당황하여 그 신인을 마이너리그로 돌려 보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이언츠의 레오 듀로서는 그의 어린 중견수에게 믿음을 가졌고, 메이즈는 구장 왼쪽 지붕 위를 날아가는 홈런으로 자신의 무안타행진을 끝냈다.

메이즈가 메이저리그에서의 자신의 두번째 안타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또 다른 13타석이 필요했지만, 그는 곧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치는 요령을 터득했고 시즌이 끝나기 이전에 19개의 홈런을 더 때려냈다.

그의 눈부신 수비력은 이미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이 첫 시즌에 그는 자신의 가장 멋진 수비 중의 하나를 선보였다. 피츠버그와의 경기에서 그는 그라운드를 질주하며 475피트짜리 타구를 맨손으로 잡아낸 것이다.그의 활약은 팀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끌고 갔다. 자이언츠는 그 해 내셔널리그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하였다.

이 희망적인 질주는 메이즈가 육군에 징집되었을 때 간단하게 중단되고 말았다. 그의 팀은 그가 없는 두 시즌 동안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이언츠로 돌아온 54년, 그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월드시리즈로 팀을 이끌었다.

자이언츠는 4연승으로 시리즈를 제패하였고, 이 4차전 중 1차전에서 메이즈는 어깨 너머로 가는 타구를 잡아내는 멋진 수비를 보여주었다. 비록 이것이 아직까지도 야구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플레이 중의 하나이지만 메이즈 그 자신은 정작 55년 올스타 경기에서 그가 이루어낸 믿기 어려운 플라이볼 캐치를 좋아한다.

조 디마지오는 메이즈가 야구 선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송구력을 가졌다고 말했다.메이즈의 7095번의 척살(타자,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은 외야수로서는 최고의 기록이지만, 메이즈는 또한 타자로서도 뛰어났다.

그의 통산 타율은 .302나 되며,연속적인 8년 동안 그는 한 해에 100타점 이상을 올렸다.또한 그의 660개의 홈런은 역사상 3번째의 대기록이다.

그는 골드 글러브를 12번이나 수상했고, 54년과 65년 두 번에 걸쳐 내셔널리그 MVP에 뽑히기도 했다. 한 스포츠 기자가 말한 것처럼 윌리 메이즈는 평범한 플라이를 처리할 때에도 줄곧 두 손으로 처리해야 할 만큼 신중했다는 것은 작은 놀라움이 될 것이다.

자이언츠가 58년에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 메이즈는 새로운 홈 관중들을 자기편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만 하였다.

62년 그는 자이언츠에게 또 다른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가져다 주었고, 64년에는 팀의 주장이 되기도 했다. 66년에 자이언츠는 스포츠 역사에서 잠시 동안이지만 그를 최고 연봉선수로 만드는 새로운 계약으로 그에게 사인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안 그는 두 선수 사이에 벌어진 방망이를 휘두르는 싸움을 진정시키고, 팀의 단장이 스포츠 기자에게 무심코 한 인종적인 발언으로 야기된 어쩌면 폭발적인 상황이 되었을 것을 가라 앉혀 중재자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72년, 윌리 메이즈는 신생팀인 메츠에서 뛰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그 해에 터진 야구 파업 동안 많은 선수들은 메이즈 같은 베테랑들이 장기간 지속되는 파업을 지켜보는데 인내할 수 없을까봐 걱정했다.

비록 자신의 마지막 시즌을 날려 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이 뒤따랐지만 메이즈는 신념이 굳었고,젊은 선수들과의 결속은 젊은 선수들로부터 새로운 존경심을 얻게 되었다.

73년 자신의 글러브를 영원히 걸어놓은 뒤 윌리 메이즈는 잠시동안 메츠구단에 남았다.그리고 그는 79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86년 윌리 메이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돌아와 구단주의 특별자문으로 일했다. 93년에 자이언츠는 이것을 종신 계약으로 바꾸었다.하지만 야구 역사에서의 그의 위치는 더욱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야구사에서 윌리 메이즈는 불후의 인물 중의 한 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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