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 하고 가죽재킷 입어보니 노랑 머리 애들이 이해되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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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14면

김정운(50·사진) 전 명지대 교수야말로 젊게 사는 중년인 ‘미중년’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다. 파마머리에 슈베르트풍의 둥근 안경과 나비넥타이, 아저씨답지 않은 멍하고 귀여운 표정. 무엇보다도 그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생각이 젊어서다. 베스트셀러 '남자의 물건''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에서 그는 한국의 중년남자들이 왜 불행한지를 문화심리학의 틀을 빌려 유쾌·상쾌·통쾌하게 풀어냈다.얼마 전 그는 또 아저씨답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 교수 직을 그만두고 훌쩍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충전을 위해서다. 현재 나라(奈良)현립대학 도서관에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일본어를 배운다. 본지에 격주로 ‘김정운의 에디톨로지’를 연재하고 있는 그에게 2일 전화를 했다.

아저씨답지 않은 ‘미중년’ 김정운 박사

-미중년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건 남자의 권력 상실로 인한 남성성의 전환이다. 권력이 남자한테 있었을 때는 외모를 가꾸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권력을 쥐는 데서 오는 후광효과로 남성성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남자의 모든 위치가 흔들린다. 평생직장 개념은 없어졌다. 아직 한창 때인데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한다. 집에선 마누라 눈치가 보인다. 자식들하곤 말도 안 통한다. 정체성의 위기다. 외모를 가꾸는 건 젊음을 유지해 자아를 찾겠다는 눈물겨운 시도다.”

-외모 가꾸는 남자를 ‘기생오라비같다’고 보던 게 전통적 시각인데.
“지금까진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강했다. 그래서 외모 가꾸는 걸 ‘여자 따위나’ 하는 걸로 무시했다. 남성중심적이고 교만한 사고다. 21세기는 형식이 내면을 규정하기도 하는 시대다. 외모처럼 다양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걱정해야 남자답다고 여기던 시대는 갔다.”

-외모가 50대 같지 않다.
“40대 들어 원형탈모가 생겨 파마를 하게 됐다. 남자에게 탈모는 여자로 치면 폐경기 같은 거다. 남자가 평생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고통스러운 수술 중 하나가 모발이식이다. 그런데도 많은 남자가 모발이식을 한다. 탈모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파마를 했더니 빠진 부분이 가려졌다. 새 헤어스타일엔 예전에 입던 옷이 안 어울렸다. 그때부터 청바지도 입고 나비넥타이도 맸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을 것 같다.
“처음엔 많이 헤맸다. 아내한테 무지 혼났다. 이상한 옷 사느라 돈 없앤다고. 대학생 아들 티셔츠도 훔쳐 입어봤고 아들한테 동대문시장 가서 티셔츠를 사오라고도 했다. 그 전엔 감색 양복 일색에, 바지도 허리 위까지 올려입는 ‘배바지’였다.”

-외모에 신경을 써보니 무엇이 달라지던가.
“나만의 스타일을 만든다는 게 점점 즐거워졌다. 양복을 입을 때도 양말·벨트·구두를 어떻게 고를까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다. 동시에 남의 스타일에 대해 관대해졌다. 그전엔 노랗게 머리 물들이는 애들을 보고 ‘양아치’라고 욕했다. 파마를 하고 보니 이해가 됐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거다. 난 원래 외골수에 성미가 고약했다. 나와 다른 걸 용서하지 못했다. 파마하고 가죽재킷을 입어보니 의식이 서서히 바뀌었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패션잡지도 보게 됐다. 내가 하던 학문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라졌다. 심리학만 고집할 필요가 없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관심을 넓히게 됐다. 나에 대해, 남에 대해, 세상에 대해 관대해졌다. 관용을 배운 거다. 언젠가는 몸에 쫙 붙는 섹시한 가죽바지를 입는 게 꿈이다.”

-꼭 외모를 가꿔야 미중년인가.
“외모는 방법론의 하나일 뿐이다. 외모 가꾸기는 외모와 관련된 여러 재미난 일을 즐길 줄 안다는 뜻이다. 인생을 다양하게 느끼고 즐기며 살다보면 행복해진다. 행복하면 젊게 보이는 거고. 한국은 경제적으론 선진국 수준이지만 정작 국민은 선진국이란 자의식이 별로 없다. 그게 문화적 다양성, 독일어로 하면 ‘빌둥(Bildung·교양)’이 부족해서다. 영국의 댄디즘은 신사가 앞장서 근대 교양의 시대를 연 거다. 한국의 미중년, 꽃중년도 이런 맥락으로 쓰이고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배에 식스팩 만들고 얼굴에 비비크림 바르는 식으로 정형화되거나 명품 브랜드를 걸쳐야 한다는 소비주의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도 콧수염·턱수염·구레나룻 등을 기른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난 나꼼수 열풍의 이유 중 하나가 주진우의 선글라스, 김어준의 풀어헤친 파마머리에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별로 보기 힘들던 남자의 멋스러운 모습 아니었나. 보수 쪽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나와주면 좋겠다. 홍정욱 새누리당 전 의원을 보라. 머리에 기름 발라 넘기고 가슴에 행커치프 꽂고 이러니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모른다. 보수가 젊은이들한테 어필하고 싶으면 스타일부터 바꿔야 한다.”

-만나본 사람 중 ‘진정한 미중년’이라고 감탄했던 이가 있다면.
“영화배우 안성기(60)씨와 차범근(59) 감독이다. 둘 다 직업적 이유 때문에 외모가 유지되긴 하지만, 그보단 나이 들어서도 자기 삶에 대한 가치관이 분명하고 품격이 느껴졌다. 내면이 꽉 차 있는 데서 나오는 아우라가 있으니 뭘 입어도 멋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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