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CEO 3인이 되돌아 본 2000년 IT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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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이 저물고 있다.정보기술(IT)관계자들은 2000년은 잊지 못할 한 해라고 입을 모은다.이들은 올 1년이 마치 10년보다 더 길었다고 말한다. 수십년동안 경험해야 할 일들을 단 1년만에 경험했다는 얘기다.그만큼 IT기업의 부침이 심했다는 말도 된다.

올초 코스닥 시장에서 IT주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재웅(32)사장,

절반이 넘는 시장점유율로 국내 PDA(개인휴대정보단말기)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제이텔의 신동훈(37)사장,

슈퍼컴퓨팅 솔루션 개발에 열심인 글로벌인터넷비즈니스(GIB)의 김봉태(39)사장.이들 3명의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올 한해를 되돌아본다.

이재웅:어떤 CEO는 올 한해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기분이라고 하는데,저는 지옥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천당은 갔다 온 것 같습니다. 연초에 벤처가 각광받으면서 우리 회사도 그렇고 나라 전체가 들떠 있었지요. 하지만 요즘 시장 분위기가 과도하게 냉각되면서 여러 업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정상화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냉정하게 사업을 되돌아보고 신발끈 다시 매고 뛸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봅니다. 다만 ‘닷컴’중 선도기업으로서 연초에 좀 더 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일반인들이 벤처에 기대했던만큼 선도하는 모습과 높은 성장성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해 본 나라나 벤처도 없을 겁니다.

신동훈:지난 1년간 벤처를 바라보는 투자자와 일반인의 잣대가 완전히 바뀌어 당혹스러웠습니다. 초기에는 미래가치 ·성장성 ·가입자수 등으로 회사의 가치를 평가하다가 일순간에 오프라인의 평가잣대인 매출과 이익이 얼마나 되는가로 바뀌었지요. 하지만 이것도 한국 벤처가 글로벌스탠다드로 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김봉태:올해로 벤처를 시작한지 4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4년 동안 한 고생을 올해 다한 것 같아요.주변에서 가벼운 아이템으로도 투자를 많이 받는 것을 보고 우리도 거기에 동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솔루션 개발이 주력인 GIB는 닷컴쪽에 눈을 돌려 인터넷 서점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핵심 역량은 슈퍼컴퓨팅 솔루션 쪽으로 집중하기 위해 인터넷 서점 사업을 접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연초엔 많은 벤처기업이 코스닥에 등록하면서 벤처기업을 하면 쉽게 돈을 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지요. 젊은 사람들이 머니게임을 한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지금 코스닥에 등록된 벤처기업의 상당수는 역사가 5∼10년 된 회사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등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버텨낸 회사들이지요. 그런 기업과 머니게임으로 움직이는 회사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사실 정현준 ·진승현 같은 사건은 일반 기업에서도 터질 수 있는 일인데 벤처라고 해서 침소봉대된 감이 없지 않아요.

신:머니게임은 어디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꼭 벤처기업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선진 금융기법 도입,사업다각화, M&A는 활성화돼야 한다고 봅니다.다만 비리가 생길 수 없게 미비된 제도를 보완해야 겠지요.

김:벤처기업도 자본의 논리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수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게 돈이지요.벤처 업계에도 많은 돈과 함께 금융전문가들이 들어왔습니다. 그 와중에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주변을 보면 CEO가 펀딩(투자유치)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줄이 마르다 보니 회의에서 화두는 펀딩이 되고 기술개발이나 장기전략을 짜는데 소홀해 지는 것이지요.

이:일부 벤처에 대한 비관론도 있는데, 인터넷 ·PDA ·핸드폰을 쓰는 이용자가 최고점에 달했다고 해서 이용자들이 이들 제품의 사용을 줄이지는 않을 겁니다.물론 현재의 기업들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할 수 있느냐,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느냐는 여러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인터넷기업도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수익을 보여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이제 투자자도 벤처에 투자해 수백배를 남길 수 있다는 ‘대박’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요즘 벤처기업의 코스닥 진출이 매우 어렵습니다. 미래가치가 있는 유망 벤처기업이 살 수 있는 길이 봉쇄당하고 있는 겁니다. 중견 벤처기업이 주식시장에서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자금을 끌어들일 수 없으니 신생기업도 투자를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투자자가 대박 환상에서 벗어나고 코스닥 시장이 제기능을 해야 벤처의 미래가 밝아지겠지요.

김:최근에 생긴 많은 벤처들이 내년에는 코스닥 등록도 하기 전에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이를 위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아주 좋은 조정기라고 봅니다. 사실 벤처붐이 일기 전인 98년까지만 해도 ‘대박’을 꿈꾸며 벤처를 시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기술력 있고 전략이 우위있는 회사들은 돋보일 수 있는 상황이 될 겁니다. 빨리 투자를 받아 1년 안에 승부를 걸겠다는 자세로 회사를 경영하는 CEO에게는 ‘봄’은 빨리 오지 않겠지요.

신:저는 현 상황을 조정기라고 봅니다.조정기가 지나고 나면 벤처도 자리잡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기요소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대로 벤처기업이 과거의 잣대로는 투자받기가 너무 쉽지만 요즘의 잣대로는 너무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일부 벤처기업들은 현재의 투자잣대인 매출 ·이익을 높이기 위해 편법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 올해 우리나라 벤처가 겪은 불신을 내년 또는 내후년에 겪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신:펀딩받을 때 CEO들이 너무 높은 배수에만 관심을 가졌었다고 봅니다. 높은 배수로 투자유치를 받으면 사실 그 이상을 투자자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올초 높은 배수로 펀딩을 받아놓고 요즘엔 추가투자를 못받아 고생하는 업체가 많은 것도 높은 배수로 받은 1차 펀딩이 부담을 줬기 때문이지요. 성장단계에 맞게 회사의 가치를 인정받는게 중요합니다.

이:맞습니다.기업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업체도 많았지요. 무조건 높은 배수로 펀딩을 받으려고 한 회사가 많았습니다.

김:맞는 말씀이지만 돈이 많지 않은 벤처기업 입장에서 사실 그 유혹(높은 배수의 펀딩)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투자받을 때 배수는 낮더라도 회사에 도움이 되는 투자 파트너를 골라야 합니다.

신:요즘 IT기업들이 살아남는 게 최고라는 생각에 투자를 줄이는 경우가 많은데, 돈 안쓰는 기업은 이미 벤처가 아니지요. 리스크(위험)가 있더라도 투자해야 합니다. 회사를 운영하다가 역량이 안되면 다른 회사와 합쳐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수 있는 게 벤처입니다.

이:맞습니다.투자할 것은 해야 하지요. 올 초까지만 해도 필요 이상으로 인력을 늘리는 등 비합리적으로 운용하는 경우도 많았지요.

김:수익모델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벤처기업은 미래에 대한 가치로 평가해야 합니다.

이:내년 전망은 어떻습니까.전통적으로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분야가 많지 않았습니다.IT는 현재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몇개 분야 중 하나이기 때문에 IT를 적극 육성해야 합니다. '닷컴몰락 →솔루션 ·장비업체 위축 →IT산업 붕괴’라는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닷컴기업들이 이미 많은 투자를 했고 올해부터 광고·전자상거래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수익을 낼 것으로 봅니다. 올해까지 IT기반을 닦았다면 내년부터는 IT분야가 본격적으로 사업화되는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신:내년에 IT산업이 올해처럼 성장률이 높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IT분야가 어떤 다른 분야보다 빨리 성장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술 개발에 노력하고 대기업 ·인터넷 포털 ·솔루션업체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해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새해엔 B2B와 무선인터넷 분야가 크게 발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미래를 보는 눈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벤처기업은 미래의 흐름을 빨리 읽어 사업화해야겠지요. P2P분야가 유망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김창규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참석자>

▶김봉태 글로벌인터넷비즈니스 사장
▶신동훈 제이텔 사장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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