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산책] 모처럼 찾은 저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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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광릉을 향해 가다 장현에서 오른쪽으로 시오리 접어들면 신도시 살림차리기가 한창인 오남리가 나오고, 예서 다시 저수지옆 고샅길을 따라 십리쯤 되는 곳, 천마산기슭에 팔현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워낙 구불구불 휘어도는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옴팍한 막동네라 늘 싱싱한 바람과 질박한 사람내가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내게 특히 더 살가운 것은 이곳이 내 절반의 뿌리인 외갓동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바쁘다는 핑게로 몇년을 버티다 모처럼 찾아가니 죄송한 마음에 모두 낯익은데도 새삼 새롭기만 하다.

암갈색 겨울산이 거꾸로 박힌 저수지 수면 위로 바람이 분다.

가뭄으로 물이 한결 줄었을뿐 한겨울인데도 얼지않은 채 맹숭맹숭하니 잔물결만 일었다 스러지곤 한다.

뚝방 밑 강태공은 무엇을 낚는지 억새풀이 한무덕 날라가는지도 모르고 오종종한 얼굴로 연신 담배만 빨아댄다.

오십오년전 어머니가 가마타고 시집오시던 길이, 방학때면 형제들과 요기거리를 챙겨 달려오던 그 길이 저 속에 잠겨있다.

오남리 목수아저씨네, 수염 난 할머니네를 지나 거슬러 오르는 곳에 있던 방앗간 하며, 이무기가 살았다던 도깨비 둠벙, 숨이 차 다리를 쉬어가던 바우백이가 기억속에 고스란하다.

친정을 떠나는 게 슬퍼서, 대처로 나가는 줄 알고 좋아서,가마가 흔들릴 때마다 깃터진 사이로 고향길을 훔쳐보시던 꽃같았을 어머니의 새색시적 고운 자태가 물위로 흐른다.

시부모(특히 할머니는 엄청 호랑이셨다) 를 모신 농촌살림에 아들 다섯 딸 하나를 고이 길러내시느라 등이 휘어버린 채 산수(傘壽 : 팔순) 를 눈앞에 두신 어머니의 세월을 어이하리-.

싸한 마음에 한참을 상념에 젖어 걷다가 저수지가 끝나는 곳에 다달아 덩그마니 외따로 있는 음식점을 보니 정신이 버쩍 든다.

아, 저 곳에 물방앗간이 있었는데….

어느새 이 곳에까지 상혼이 쳐들어왔구나. 하기사 먹고 살자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지만 영 기분이 편치않다. 그러고보니 벌써 동지이자 세밑이다.

동지치고도 노동지(老冬至 : 동짓달 하순에 든 동지) 인데 눈다운 눈 한번 내리지않은 가운데 채 열흘도 안남아 달력을 또 접을 판이다.

연초 무성했던 꿈들이 허랑해진 지금 관성의 세월에 기대있는 자신이 우습다.

지난 여름 그악스런 비바람에도 잠결인양 떨쳐일어나곤했던 들풀들의 고스라진 몰골이 안쓰럽기만 한 것이 남의 일 같지않다.

그래도 저들은 나름대로 씨앗이라도 남겼을테지만 내 한 해는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에라-, 망년(忘年) 이 별거드냐. 모든 걸 지워버리게 눈이나 펑펑 쏟아져라, 쐬주나 한잔 들이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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