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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불안감에 압도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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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20년 전 들었던 ‘최불암 유머’다. 최불암은 ‘단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실험실에 들어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영어로 ‘단거’라고 써진 걸 봐서다. 그는 그러나 다음날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옆엔 반쯤 빈 병이 있었다. ‘Danger(위험)’라고 새겨진.

 실험실 생활을 하던 때여서 유독 크게 웃었다. 주변에 온통 ‘단거’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유기용매라면 다들 질겁하겠지만 당시 아세톤에 손을 담그고 살았다. 약간 과장하면 그랬다.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벤젠과 포름알데히드도 종종 썼던 것 같다. 실험실 냉장고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로 쓰였다는 포스겐도 있었다.

 불안감에 떨었느냐? 그렇지 않다. ‘단거’는 물론 해골 표시까지 새겨진 시약이 수두룩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긴장한 건 곰팡이가 핀 땅콩이나 탄 고기를 입에 넣어야 할 때였다. 아플라톡신이니 벤조피린이니 하는 발암물질 이름이 떠오르곤 해서다.

 실험실 밖의 사람들에겐 이상 심리로 보였을 거다. 독한 걸 앞에 두고 엉뚱한 걸 타박하는 모양새였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동료가 비슷했던 걸 보면 그게 자연스러운 거였다. 일상화된 위험에 둔감하고, 낯선 위험에 예민한 것 말이다.

 인간은 이렇듯 위험성을 평가하는 데 둔재들이다. 운송 수단의 사상률만 놓고 보면 못 탈 게 자동차인데 비행기를 겁낸다. 독한 담배를 피우고 폭음하면서 휴대전화의 위해성을 걱정한다. ‘캘리포니아 지진으로 인한 대홍수로 1000명 이상 사망할 가능성’이 ‘1000명 이상 사망자를 낳을 대홍수가 미국에서 발생할 가능성’보다 크다고 인식하는 것도 같은 유형이다. 지진이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는 수많은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한데도 그렇다.

 이 때문에 불안감에, 두려움에 뭔가를 결정한다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9·11 테러 이후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사용하다가 1596명이 숨졌다지 않은가.

 공공정책도 매한가지다. 『이유 없는 두려움』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1990년대 초반 뉴욕 공립학교에서 석면 파동이 일었다. 석면의 위험성 때문에 개학을 늦춰야 한다고 하자 학부모들이 반색했다고 한다. “아이들 건강이 위험하다는데…”라면서다. 그 과정에서 “극빈층 아이들이 처한 수많은 문제에 비하면 석면의 실제 해악은 미미한 수준”이란 전문가들의 견해는 무시됐다. 그러나 3주 후 학부모들은 생각을 바꿨다. 이런저런 문제를 실감한 뒤였다. 미국 정부는 2006년 “유해하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실리콘 유방 보형물에 대한 판매금지 조치를 풀었다. 10여 년간 기업과 여성들 간 난타전이 벌어진 뒤였다. 저자는 “어떤 수를 써도 유해하다고 믿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할 거다. 비극적 사건의 승자들은 변호사들뿐”이라고 했다.

 ‘미국산 쇠고기 얘기로군’이라고 간파한 독자가 많을 거다. 맞다. 그 얘기다.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할매 젖소’가 발견된 이후 다시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가 많다. 2008년 두려움이 되살아난 듯하다. 한국에 수입되지 않는다거나 117개국이 여전히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고, 수입 중단한 것으로 알려진 인도네시아·태국도 여전히 우리와 유사한 조건의 살코기를 수입한다는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그래도 불안감에 압도돼선 안 된다. 합리적 결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어서다. 정부의 자원은 한정돼 있다. 어느 한 곳에 과도하게 투입하면 비는 곳이 생기게 마련이다. 검역만 봐도 알 수 있다. 쇠고기 검역에 30명을 추가 투입했다는데 그 전문가들이 어디서 왔겠는가. 쇠고기 검역은 잘 될지 몰라도, 용인검역소는 제대로 굴러갈지 몰라도 다른 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어렵더라도 가슴 대신 머리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에겐 “우리가 두려워할 건 두려움 그 자체다.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이름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두려움만 극복하면 후퇴를 전진으로 뒤바꿀 수 있다”(프랭클린 루스벨트)고 힘을 줄 대통령도, 적어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학습능력을 가진 정부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