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부채 땜질처방 이제 그만] 下. 대안은 무엇인가

중앙일보

입력

경북 왜관의 농민 박모(39)씨는 경운기 구입을 위해 지난해 1월 신청한 농기계자금을 올해 5월에서야 받았다. 며칠 뒤에는 농협 직원이 방문해 경운기 옆에 자신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갔다.

정책자금으로 실제 농기계를 구입했는지 확인하는 서류에 첨부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朴씨는 "경운기 고유번호를 확인하면 더 확실하지, 사진이야 남의 경운기 빌려서 찍으면 그만 아니냐" 며 답답해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부채대책 등 전반적인 농업금융정책의 틀을 하루 빨리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농민의 입장과 수요는 무시한 채 농림부의 국.실.과별로 저마다 각종 지원정책들을 쏟아내다 보니 절차는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부채문제는 어떻게=금리인하, 장기 분할상환, 연체이자 면제, 경영안정자금 추가지원과 같은 기존의 부채대책들은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농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금융거래의 책임회피 현상과 농정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키우는 등 역기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생산성 향상.개발.육성 위주로 돼 있는 대부분의 정책자금 예산을 앞으로는 대폭 줄이되 감축부분을 기존 부채의 상환능력을 높이는 데 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정책자금을 무작정 지원하기보다는 일정 수준의 소득보장 및 생활안정에 돌리고 농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의 정부출연금을 늘려 연대보증 문제를 해소시켜주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충북대 성진근 교수는 "농가의 평균 수익률과 실제 이자율 차이를 정부가 메워주는 이자보상지원제도와 정부가 내년도 시행예정인 '논농사 직불제' (벼농사를 짓는 농가는 무조건 일정 금액을 정부가 직접 지급)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일부 품목에서만 부분적으로 실시 중인 농작물재해보험의 품목을 확대하면서 보험료를 정부가 대폭 보조하고, 현재 배추.무.고추 등의 판매가격이 폭락할 경우 정부가 매입해주는 기준가격을 최저생산비 수준에 근접하도록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건국대 김영철 교수는 "간접적인 방안이지만 학비.생활자금 등 가계자금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결국 농가부채 경감혜택이 있다" 고 전제, "농촌지역 대학생에게 장학금 지원을 확대하고, 현재 예산부족.경제성 등의 이유로 줄어들고 있는 농촌의 교육.병원.문화.교통시설을 어느 정도 유지해 거주비용을 줄여줘야 한다" 고 말했다.

◇ 종합자금제 확대해야=농촌경제연구원 박성재 연구원은 "현재 각종 정책금융들이 정부계획 아래 연도별 예산사업으로 이뤄지다 보니 막상 자금을 받을 무렵에는 필요성이 사라지고 사업효과가 떨어지는 단점이 발생한다" 며 "각종 자금을 통합해 농민의 수요에 맞춰 적시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일선 금융기관이 심사권까지 갖는 '농업경영종합자금제' 를 하루빨리 확대 시행해야 한다" 고 말했다.

현재는 축산업을 하려면 기계.농지구입.축사시설.기반시설.운영.사료생산자금 등을 각각 신청해야 하고 지급되는 시점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일본의 '슈퍼자금' 처럼 종합자금제를 도입할 경우 명목을 세부적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적인 사업계획서 한장만으로 원하는 시점에 자금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농림부 관계자는 "종합자금제는 내년에 2천1백억원의 예산을 배정해 축산.화훼.과수.채소농가를 대상으로 시범실시할 계획" 이라며 "다만 이 경우 자금의 전용 가능성이 있는데다 농협이 심사권을 가질 경우 담보설정 등 상환능력에만 초점을 맞출 우려도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농림부의 다른 관계자는 "자금전용 감시나 사업성 평가 등의 문제는 어차피 행정기관보다는 일선 농협이 더욱 효과적" 이라며 "농협이 직접 이해당사자가 되도록 권한과 책임을 함께 넘길 필요가 있다" 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농협이 독점하고 있는 정책자금의 운용을 앞으로는 우체국이나 지방은행에도 허용해 서로 서비스경쟁을 벌이도록 하고, 운용실적과 실수요자인 농민들의 평가에 따라 자금배정을 달리 하는 방안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 생산.가격조절 기능=농가부채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농산물의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폭락 문제다.

한 농가가 방울토마토를 온실재배해서 성공했다거나 배 농사로 돈을 벌었다면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도 온실 짓고 과수원을 마련해 똑같은 작물 재배에 나선다.

이른바 '우 따라하기' 현상이다. 결국 선발주자를 제외한 대부분은 참담한 실패를 볼 뿐이다.

이에 대해 농촌경제연구원은 "영농조합법인이나 작목반별로 위원회를 구성해 생산량을 스스로 조절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농가는 농림부 장관이 심사 후 유통중지명령을 내릴 수 있는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해마다 어떤 품목의 생산량이 넘칠지 모자랄지를 조사해서 알려주는 '농업관측제도' 의 기능도 대규모로 확충하고, 농산물 전자상거래를 통한 직거래를 활성화 해 현재 도시상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유통수익의 상당부분을 농촌에 되돌리는 정책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제부=이효준.송상훈 기자
전국부=정기환.양영유.구두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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