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년·장덕수·김사국, 청년·사회운동 주도권 다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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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호 26면

김사국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은 조선청년회연합회 등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전(全)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해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사진 독립기념관]

대일항쟁기 때 한인 사회주의자가 탄생하는 경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민족주의 운동으로 출발해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국내 최대의 자생적 사회주의자 운동 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金思國)도 이런 길을 걸었다. 김사국은 1919년 4월 23일 전개되었던 국민대회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대한민국 임시정부①망명정부 탄생하다’ 참조)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⑤ 서울청년회

국민대회는 3·1운동보다 조직적이었다. 서울 종로 서린동 봉춘관(奉春館)에 13도 대표가 모여서 ‘국민대회’라는 간판을 걸고, 동시에 민중이 운집해 독립을 요구한 것이었다. 하루 전날인 4월 22일 밤 김사국은 장채극(張彩極)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통의동으로 갔다. 김사국은 통의동 이경문(李景文)의 집인 한약방 홍제당(洪濟堂)에 목사 이규갑(李奎甲)으로부터 받은 ‘국민대회’라는 간판(길이 120㎝×세로 45㎝ 정도)과 목판 인쇄물 6000여 장을 숨겨 두었다. 또한 전옥결(全玉<73A6>)이 제작한 ‘국민대회(國民大會)’, ‘공화만세(共和萬歲)’라는 9개의 깃발도 있었다. 국민대회 당일 자동차 세 대를 타고 깃발을 흔들고 유인물을 뿌리며 한성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는데, 이를 주도했던 김사국과 장채극은 훗날 모두 서울청년회의 주요 구성원이 된다.

김사국. 서울청년회의 리더였지만 1926년에 요절했다.

충청도 연산 출생의 김사국은 1908년께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회사 등을 다니며 고학하다가 도쿄 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에 가입했다. 귀국 후 교편을 잡던 김사국은 1918년 만주 철령(鐵嶺)으로 건너가 관동도독부의 육영학교에 입학해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 후 개원(開原)농장에서 농업 견습을 하다가 1919년 2월 26일 서울로 돌아왔다.

국민대회 사건으로 체포된 김사국은 3·1운동 직전에 귀국한 데 대해 일제가 “만주에서 불온한 무리와 사귀고 서울에 시찰하러 온 것이 아닌가?”라고 심문하자 “나의 신병과 어머니의 신병 때문에 서울로 돌아왔다”고 답했다. 심문에서 김사국은 자신의 역할을 축소해서 진술하고 있지만 귀국 직후부터 국민대회 사건에 깊숙이 관련되는 것으로 봐서 신병 때문에 돌아온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김사국은 국민대회 사건으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상소권을 포기하고 1년6개월 형을 복역한 후 1920년 10월 말에 석방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로 출발한 김사국은 이후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장덕수. 민족주의 세력의 젊은 리더로서 청년회 연합운동을 주창하다 사회주의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김사국이 석방되었을 때 국내 정세는 크게 변해있었다. 일제가 헌병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든 말든 한국은 이미 격렬한 사회운동의 한가운데 들어가 있었다. 여학교 교사까지 칼을 차고 수업하게 했던 헌병통치의 결과로 전국적 시위가 일어났으니 더 이상 폭압통치를 계속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문화통치로 변경했지만 속으로는 고등경찰이 모든 민족·사회운동을 통제하는 정보·공작정치로 식민지배의 속성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에 우후죽순 격으로 청년단체가 출범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에서 발간한 조선치안상황(朝鮮治安狀況)에 따르면 1920년에 전국 각 도의 청년회는 모두 251개였으나 1921년에는 446개로 급증했다. 이런 단체들은 겉으로는 합법적인 청년단체를 표방했고, 노선도 다양했지만 대부분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단체였다. 이런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으면 큰 힘이 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이때 먼저 선수를 치고 청년단체의 통합을 주창하고 나선 인물이 민족주의자였던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張德秀)였다. 장덕수는 192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 “각지(各地) 청년회에 기(寄)하노라-연합을 요망(要望)”이라는 사설을 써서 각 청년단체의 연합을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이 적대적이 아니었으므로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 주장에 대해 사회주의 세력이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해 6월 17일 서울 삼청동에서 청년회 연합기관 결성을 위한 모임이 열렸다.

그런데 이들이 결성하려던 연합청년회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서울지역의 청년회를 묶는 서울청년회였고, 다른 하나는 전국 각지의 청년회를 묶는 조선청년회연합회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된다고 해도 그 핵심은 서울청년회일 수밖에 없어 서울청년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세력이 전체 주도권을 잡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울청년회를 조직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는 움직임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연합회 결성을 위해 입정정(笠井町:중구 입정동) 공문사(共文社)에서 정기 모임을 열었는데 문제는 활동자금이었다. 청년회 연합운동에 나선 인사들 사이에는 3000여원의 거금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00여원이 있을 뿐이었다. 거액설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레닌으로부터 받은 코민테른 자금의 일부를 국내의 장덕수·최팔용 등에게 전달한 것이 와전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훗날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충돌하는 ‘사기공산당 사건’으로 비화된다. 박승익(朴勝翊) 등의 후원으로 자금 문제가 일부 해결되면서 6월 28일 태화관에서 53인의 대표가 모여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期成會)’를 발기하고 오상근(吳祥根)을 위원장으로, 장덕수, 김한(金翰), 윤자영(尹滋瑛), 이영(李英), 김명식(金明植) 등을 간부로 각각 선임했다.

드디어 6개월간의 준비 끝에 1920년 12월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이하 청년회연합회) 결성을 위한 창립총회가 열렸다. 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은 오상근, 집행위원은 윤자영, 이영, 안확, 장도빈, 장덕수, 이봉수 등이었다. 갓 출옥한 김사국은 서울청년회 결성에 매진했다. 어차피 서울청년회를 장악하는 쪽이 청년회연합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21년 1월 서울청년회가 결성된다. 서울 종로의 와룡동 131번지에 본부를 둔 서울청년회는 이사장제를 채택해서 이사장에 이득년(李得年), 이사에 김사국, 장덕수, 오상근, 김명식, 윤자영, 한신교(韓愼敎) 등을 선임했다. 청년회연합회와 서울청년회는 간부 구성으로 볼 때 사실상 같은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청년회가 청년회연합회의 핵심부를 장악한 것이었다.

1920년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세력이 되는 서울청년회는 대략 3개 그룹의 연합이었다. 첫째는 이득년·오상근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 그룹이고, 둘째는 장덕수·김명식·윤자영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혁명당 그룹이고, 셋째는 김사국·한신교·이영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그룹이었다.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1919~1923)) 크게 보면 장덕수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세력과 김사국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이었는데, 명목상 지도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차지했다.
서울청년회 이사장 이득년은 유림(儒林) 출신으로서 이회영 등과 고종 망명 작전을 추진했던 인물이고 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 오상근도 민영환(閔泳煥)의 부관을 지낸 대한제국 무관 출신으로서 이득년 등과 함께 고종 망명 작전에 관련된 인물이었다. 개인적 명망 때문에 두 조직의 수장에 추대되었지만 이들에게는 두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조직력이 없었다.

서울청년회 결성의 한 축이었던 사회혁명당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혁명당의 모체는 1916년 봄 도쿄 간다구(神田區)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한국과 중국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아(新亞)동맹단’이었다. 한국 측에서 장덕수, 김철수(金綴洙), 최익준(崔益俊)이, 중국 측에서 황개민(黃介民:황각), 나할(羅割) 등이 참여한 신아혁명단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3·1운동 이후인 1920년 6월 신아동맹단의 한국 측 인사들은 서울 최린의 집에서 제5차 대회를 열고 사회혁명당으로 개칭했다. 사회혁명당 선언서는 “계급과 사유제도의 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 등을 주장해 사회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했지만 그 구성원 중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동휘의 측근으로 코민테른 자금을 수령한 김립과 사회혁명당의 허헌(許憲)은 동경 유학생 시절 의형제이기도 했는데, 이런 경위로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는 장덕수, 김철수, 홍도 등 사회혁명당 출신들이 대거 가담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던 것처럼 사회혁명당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청년회연합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동아일보와 사회혁명당의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이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세력이 국내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김사국 등이 바라볼 때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해외가 아닌 국내 운동세력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사국 등은 청년회 내의 민족주의 세력 축출 운동에 돌입했다. ‘김윤식 사회장 반대 사건’이나 ‘사기공산당 사건’ 등은 이렇게 촉발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