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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서초 송파 &] 치과의사들 소리소문 없는 봉사 16년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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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는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했다. 그는 서울대 치대 전신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다니는 엘리트였다. 재학 시절 복지시설을 찾아 다니며 무료 진료를 했다. 졸업 후에도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환자는 고아, 나환자, 무의탁 노인, 지체장애인 같은 소외계층이었다. 그를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정신과 몸이 온전치 못한 장애인들은 더욱 그의 손길을 요구했다. 그는 이렇게 40여 년을 살며 장애인을 위한 치과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그러다 1996년 어느 모임에서 당시 서초구청장이었던 조남호씨를 만났다. 그는 조 구청장에게 장애인용 치과가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조 구청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 구청장도 사고로 눈을 다쳐 두 달 넘게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장애인의 아픔을 잘 알게 됐다.

 두 사람은 합심했다. 조 구청장은 서초구보건소장과 의학과장을 불렀다. “서초구보건소에 장애인 치과를 만들 거요!” 구청장은 결심을 밝혔다. 구청장 옆에 있던 그는 장애인 치과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가 돌아간 뒤 서초구보건소장과 의학과장은 구청장에게 난색을 표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소리부터 할거요!” 조 구청장의 말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해 9월 23일 보건소에 장애인 치과가 문을 열었다. 그는 다른 치과의사들에게 장애인 치과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하자고 부탁했다. 그가 고(故) 기창덕 박사다. 고인의 뜻을 따르는 후배 치과의사들의 봉사정신 덕분에 장애인 치과는 16년째 운영되고 있다.

 “치료 받는 장애인들이 정말 고마워 하더라고요. 제게는 별 일이 아닌데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장애인 치과에서 3년째 진료 봉사를 하고 있는 강충규(49)씨의 말이다. 서초구치과의사회는 1998년 장애인 치과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강씨는 회원 자격으로 몇 차례 동참하다 2009년부터는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권순용(49)씨와 김현종(42)씨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공중보건의 시절 경험 때문이다. “경기도에서 이동진료차를 타고 노인과 장애인들이 사는 시설을 찾아 다녔죠. 그때 장애인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권씨의 소망은 12년 전 이뤄졌다.

“천안에서 공중보건의를 할 때였어요. 장애인학교에 가서 검진할 기회가 있었죠. 그 학교에선 치아 치료도 부탁했지만 시설·기구가 미비했어요. 그들에게 제대로 해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김씨는 5년 전 대한심미치과학회장으로부터 장애인 치과 진료 봉사를 부탁 받고서야 옛날의 아쉬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단국대 치과대학장을 지낸 이재현(82)씨는 14년째 서초구보건소를 방문해 장애인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있다. “개인 치과에서 장애인을 받아주겠어요? 우선 다른 환자들도 싫어하고요. 장애인을 치료하는 의사·간호사는 별도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실정이죠. 장애인이 치과에 가기 어려운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가 이젠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장애인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답답할 때도 있었다. “스스로 양치질을 못하는 장애인이 있어요. 보호자가 챙겨주지 않으면 치아 상태가 나빠지죠. 그런데 진료 날짜를 약속해 놓고도 춥거나 비가 오면 잘 오지 않아요. 그런 날에 보호자가 장애인을 데리고 이동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아쉬움이 남아요.” 이씨가 말했다.

 김씨는 “감정 표현이 강한 장애인도 있어요. 처음엔 ‘난 도와주려고 온 건데 이 마음을 못 알아주나’라는 생각에 오해도 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장애인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안면 기형인 장애인이 있었다. 위턱이 함몰되고 심한 주걱턱이었다. 치아도 일부 없었다. 얼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장애인 자활 시설인 ‘그룹홈’에서 생활했다. 노점상을 하며 함께 사는 장애인들과 쓸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얼굴 때문에 함께 사는 장애인들과 다투는 일이 잦았다. 권씨는 이 장애인을 위해 경희대 구강악안면외과 이백수 교수를 찾아갔다. 양악수술의 일종으로 위턱을 골절시켜 일정기간 서서히 끌어내는 치료인 ‘상악골 골신장술’을 받게 했다. 권씨가 300만원을 냈다. 수술비 8000여 만원엔 부족했지만 이 교수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이 밖에도 봉사자들은 치아가 없는 장애인들에게 틀니나 인공치아를 심는 임플란트 시술을 해줬다. 치료를 받고 난 후 편해졌다며 즐거워하는 장애인들을 보면 뿌듯했다고 한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보건소의 지원이 있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봉사자 대부분은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장애인 치과에 오는 모든 환자를 기억하고 관리하기 쉽지 않죠. 진료 일정을 잡아야 하고 치료 후 불편한 점은 없는지 꾸준히 연락해야 하죠. 현정씨가 이런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어 우린 와서 진료만 하면 된답니다.” 김씨가 말한 사람은 장애인 치과에 근무하는 임현정(40) 치위생사다. “장애인 환자가 말을 안 들으면 따끔하게 야단도 쳐요. 애정이 담긴 질책이죠. 치료를 원활히 하려면 그러한 것도 필요하거든요.” 강씨가 거들었다.

 임씨는 “장애인들은 치료 할 때 힘들지만 이후에는 좋다.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건소 소속 치과의사인 서형숙(48)씨도 장애인 치과를 돕는다. 예약 없이 찾아온 환자를 진료한다.

 보건소는 시설 투자에 힘썼다. 일반 치과에서 사용하는 치료용 의자는 시술 기구를 올려놓는 진료대가 붙어 있다. 보건소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의자에 앉기 쉽게 진료대를 분리했다. 장애인이 치료 도중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슴·배·다리를 감쌀 수 있는 가죽밴드를 의자에 설치 했다. 치과용 전신마취기, 초음파 치석제거기, 구강 엑스레이 출력기 등의 장비도 갖췄다.

 가격도 저렴하다. 충치 치료의 경우 기초생활수급장애인 또는 65세 이상 서울시민은 무료다. 건강보험가입 장애인은 치아당 1100원이다. 보철·임플란트 시술은 서초구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장애인에겐 무료다.

 서초구보건소 장애인 치과는 전국에 사는 2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으며 2000명이 넘는 치과의사가 봉사활동을 했다. 현재는 16명의 의사가 활동 중이다. 월~금요일 예약제로 운영하며, 자원봉사 의사들이 번갈아 방문해 진료하고 있다.

권영현(50) 보건소장은 “장애인의 마음을 잘 알고 봉사활동을 하는 의사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조한대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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