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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은 글 대신 이미지로 의사소통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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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TV·광고 등 현대인은 각종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이미지들은 많은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었고, 일반인에겐 고작 보는 역할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웹 속의 이미지는 다르다. 참여적이고 민주적이다.

‘이젠 무슨 재미로 TV를 보나?’ TV 시트콤 ‘순풍산부인과’가 지난 1일 종영했다. 종영 발표 뒤 SBS 해당 인터넷 게시판에는 아쉬움을 호소하는 게시물이 하루 1천여 건씩 올라왔다.

인터넷에서는 지금도 ‘순풍’의 시들지 않는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순풍산부인과가 낳은 최고의 스타는 ‘오지명’. 오지명 원장 구하기(라이언 일병 구하기)·오지명 파워(오스틴 파워)·지명네이터(터미네이터)…등 최근 개봉한 웬만한 영화들은 오지명 주연으로 패러디됐다. 오지명의 얼굴을 합성한 영화 포스터만 모아놓은 개인 홈페이지도 등장했다.

90년대 초반 정치 일색이던 유머계 판도를 바꿔놓은 것은 ‘최불암’이었다. 덩달이·만득이·공주병, 최근 사오정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최불암 시리즈는 ‘썰렁한’ 유머의 신호탄으로 10년 동안 변함없는 인기를 누렸다. 근엄한 이미지의 전원일기 김회장은 이 유머 시리즈의 폭발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시트콤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반면 ‘오지명 패러디’는 2000년대식 유머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예다. ‘말’로 하는 ‘시리즈 유머’의 시대가 끝나고 이미지 합성을 통해 설명이 필요 없이 한 번 보기만 하면 끝나는 ‘이미지 유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진 합성은 포토숍 등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간단히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수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인기 검색어 수위를 다투는 ‘엽기’의 인기 실체 역시 이미지에 있다. 엽기의 원조랄 수 있는 딴지일보(http://www.ddanzi.com)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절충 형태라면, 엽기닷컴(http://www.yupgy.com)·단무지(http://www.danmoozi.co.kr)·엽기하우스(http://www.ggame.net) 등 최근 등장한 엽기 전문 사이트들은 사진·애니메이션·동영상 등 이미지 분류를 메뉴로 만들었다.

각종 게시판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단연 연예인 사진이다. 유명 연예인들의 학창시절 사진이나 성형수술 전후를 비교한 사진, 무대 위의 실수 장면 등이 단골 메뉴다. 마이클럽 커뮤니티팀 박득희 대리는 “전체 게시물 중 3분의 1 정도가 사진”이라며 “연예인 사진이 올라올 경우, 조회 수가 1천 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고 열기를 설명한다. 어떤 연예인이 성형수술을 했다더라는 얘기는 예전에는 ‘소문’으로만 떠돌았지만, 이미지에 강한 네티즌들은 이제 눈으로 확인하는 쪽을 택한다.

오지명 패러디! 인터넷 시대의 최불암 시리즈

“퍽퍽 찰싹 탁탁.” 사무실 컴퓨터마다 때리는 소리가 진동을 한다. 올 여름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이른바 ‘스트레스 해소용’ 플래시 애니메이션은 클릭하면 효과음과 함께 캐릭터가 난타당하도록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파일은 바이러스보다 빨리 전파된다”는 한 인터넷 회사 직원의 말은 그저 흘려버릴 농담이 아닐 정도다. 보통 3분 내외의 플래시 애니메이션은 용량이 크지 않으면서도 해상도가 높은 것이 장점이다. 섬세한 표현은 불가능하지만, 간단한 애니메이션 효과를 내기에는 충분하다.

97년 처음 개발된 매크로미디어사의 플래시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들어지는 이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보편화한 것은 센드2유(http://www.send2u.co.kr)·레떼(http://www.lettee.com)·씨즈메일(http://www.cizmail.net)등 인터넷 카드 사이트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카드천사(http://www.card1004.co.kr)의 ‘허준’ 애니메이션은 오락 기능에 ‘사회비판’까지 겸한다. 정의의 사도 허준이 등장해 강에 오염물질을 버리는 미군 병사를 처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메일을 통해 네티즌 사이에서 유행한 움직이는 이미지의 선조는 gif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호빵 아이콘(facemark).

하지만 일본 원 저작권자의 항의로 지금은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서비스를 중단한 상태다. 김재인씨의 ‘엽기 토끼(마시마로)’나 김득헌씨의 ‘졸라맨’ 등 이미 명성이 난 애니메이션들 역시 개인 홈페이지와 각종 엽기 사이트들에 마구잡이로 올라가 있어 저작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한 편 만드는데 꼬박 1주일이 넘게 걸리는 ‘작품’을 자기 것인 양 하는 일이 웹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김득헌씨는 지난 25일 졸라맨 2탄을 발표하면서 무단복제를 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김득헌씨는 “여전히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다”며 “가져가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다른 사이트에 허락 없이 올려놓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도둑질’이 스타 탄생을 부른 것도 사실이다. 엽기 토끼 등 인기 애니메이션은 여러 게시판에 올라가 있지만 각각 조회 수가 1만 건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누린다. 졸라맨 김득헌씨의 경우는 출판용 집필 제의와 대학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의도 받았을 정도다.

웹에서 인기 있는 이미지는 화려하고 수준이 높은 작품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살아있는 것이다. ‘강남녀·강남남&복고녀·복고남’의 경우,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클릭하는 재미도 없는 평범한 일러스트지만 네티즌들 사이에서 잔잔한 인기를 모았다. 서울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 차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에, ‘일명 깻잎머리, 깻잎이 넓을수록 먹어준다’ 등 또래들끼리만 쓰는 독특한 용어를 소개한 덕분이다.

애들 장난이 아니라 예술

한편, 웹을 통한 새로운 시각 예술의 탄생도 기대되고 있다. ‘웹아트’ ‘넷아트’ ‘디지털 아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새로운 시도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30일까지 계속되는 ‘제2회 디지털아트페스티벌(IDAF·http://www.idaf.org)’에는 ‘웹아티스트’를 꿈꾸는 1백35개의 참가팀이 네티즌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프로그래머나 시스템 개발자 못지 않은 ‘기술’을 갖춘 예술가들이다. 올해는 젊은 참가자들이 특히 눈에 띈다. 16세의 강하나(http://hhana.sgro.net), 18세의 이휘영(http://webblow.kornet.net/hchp/hchp0044) 등은 성인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 IDAF는 성인부와 청소년부의 경계를 없앴다. 예술과 기술의 경계가 무너진 곳에선 나이나 경력도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IDAF 이승환 팀장은 “지난 해 열린 1회 행사 참가자들이 플래시 기술을 다루는 데 급급한 정도였다면 올해는 예술적인 측면에 신경을 쓴 섬세한 작품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영화와 TV·광고 등 현대인은 각종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이미지들은 많은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었고, 일반인에겐 고작 보는 역할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웹 속의 이미지는 다르다. 참여적이고 민주적이다.

누구나 웹에 자신의 사진을 담은 앨범을 올리고,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을 들여 사진합성이나 애니메이션 창작물을 올릴 수 있다. 힘내미디어의 ‘쇼유 ’(http://www.showyou.co.kr) 같은 사이트에는 직접 제작한 패러디 광고 동영상을 올리는 네티즌들이 있다. 화상 채팅과 개인방송국 운영, 아마추어 만화가·미술가들의 작품까지. 웹에서는 지금 이미지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네티즌들은 이제 ‘글’이 아니라 ‘이미지’로 커뮤니케이션 한다. 이미지의 세계에는 문법이나 논리가 없고, ‘시간’도 없다. 한눈에 보면 그것으로 끝이다. ‘O양 비디오’부터 최근 ‘백지영 비디오’ ‘미스코리아 투시사진’ 등 인터넷을 통해 유포된 이미지는 사회적인 이슈로도 부각되고 있다. 이미지야말로 인터넷 시대의 화려한 주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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