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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한 자를 위한 칸타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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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호 27면

독일 지휘자 오이겐 요훔은 카르미나 부라나를 초연했다. 1952년에 모노로, 67년엔 스테레오(사진)로 두 차례 녹음도 남겼다. 둘 다 뛰어나지만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67년 음반은 오늘날까지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박목월 시에서 바람은 ‘니 머라카노, 머라카노’ 하면서 불고, 김춘수 시에서 어린 소년의 북소리는 ‘살려다오, 죽여다오’ 하면서 둥둥 울린다고 표현됐다. 한겨울밤 내리는 눈은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쌓인다고 미당 서정주는 썼다. 총선은 끝났고 당장이라도 나꼼수의 김용민을 만나 이 시들을 들려주고 싶다. 특히 ‘괜찮다, 괜찮다…’ 하는 구절을 읊어주고 싶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무턱대고 포옹했는데 정말 하마같이 컸다. 지금 주저앉은 그 덩치를 보듬어 안고 괜찮다, 괜찮다 말해 주고 싶다.

詩人의 음악 읽기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낙백(落魄)이라는 낱말을 아는가. 넋을 놓는 것, 처지가 형편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일생에 한번쯤은 낙백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어떻게 시간은 간다. 정히 괴롭다면 공지영의 오래된 에세이집 상처없는 영혼을 읽어 보라. 두 번째 이혼을 감행하고 외국으로 피신해서 정말로 수치심에 몸서리를 치며 써내려간 글이다. 피로 써내려간 것 같은 문장, 바로 그것이다.

정말로 낙백했을 때 위로를 주는 음악이 있을까.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것은 없었다. 약혼식 올리고 유학 떠난 그녀를 8년 반이나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돌아온 말이라고는 같은 학교의 어떤 ‘형’을 사랑한다는 거였다. 아, 미국유학! 그때 나는 어디서든 영어만 들려오면 가슴이 찢어져 미친듯이 울부짖고는 했다. 음악? 음악이 무슨 개뼈다귀라는 말이냐!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절망한 주인공 트레비스가 말한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몇 년이 흘러갔다고. 낙백은 그런 것이다.

낙백한 영혼이 긴 잠에서 깨어나 기력을 찾아갈 때 들을 만한 음악이 있다. 장담한다. 경험담이니까. 카를 오르프(작은 사진)의 ‘카르미나 부라나’. 너무나 유명한 곡이라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원시전례의 분위기로 타악기와 복수의 독창자 및 합창으로 구성된 무대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란 원래 중세 유랑승들의 방종한 행각을 담은 시로 200여 편 남아있는데 1936년 오르프가 현대적 해석으로 새롭게 창작한 곡이다. 모두 3장 구성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운명의 여신, 달처럼 변하고 예측할 수 없는 여신,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에게 드리는 기도가 그 내용이다.

이 유명한 곡에서 세 가지 측면을 말하고 싶다. 먼저 고도의 단순성. 하나의 강렬한 리듬패턴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데 그 흥분한 듯 고양되어 진행되는 단순함이 일종의 오토마티즘이라고 할까, 매우 헝클어진 반지성적 정서반응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미치광이 백수 광부의 외침을 떠올려 보자. 또 하나 이 곡의 파쇼적 성격이다. ‘집단적 굴종의 테마’라 부르며 ‘카르미나 부라나’를 비판하는 음악학자들이 있다. 집단성을 표상하는 합창이 독주자를 압도하면서 복잡한 사적 내면성을 비웃는 것 같다. 실제로 히틀러 전성기에 발표되어 각광받았고 오르프는 제3제국 공인 음악가이기도 했다(하지만 나치 부역자에서 그는 면제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곡의 육체성이다. 예술적 승화 이전의 상태. 그 생경한 날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므로 곡에 반응하는 태도 또한 요즘으로 치면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을 즐기듯 몸으로 느끼는 것이 옳다.

아, 잘 표현을 못하겠다. 낙백한 자에게 왜 ‘카라미나 부라나’가 힘을 줄 수 있다는 건지. 앞서 말한 단순성·집단성·육체성이라는 명제가 절망한 인간에게 어떻게 치유책이 될 수 있는지. 그냥 쉽게 말해서 아무리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어도 그 생각을 무력화시키는 힘을 지닌 곡이라는 것.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오르프의 아내였던 작가 루이제 린저의 회상. ‘나는 날마다 남편의 죽음을 대비해야 했다.’ 카를 오르프는 한밤중에 집을 나와 죽음의 속도로 차를 몰아대는 취미가 있었다. 엔진이 터져나갈 듯 최고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달리다 새벽녘에 돌아와 기진해 쓰러져 자곤 했다는데 그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죽음의 질주로 견뎌야 했던 스트레스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 긴장이 ‘카르미나 부라나’를 배태했을 것이다.

세간에 발가벗겨져 손가락질 받게 된 김용민이건 울며불며 맥주컵을 씹어 어금니를 모조리 망가뜨린 한때의 내 꼬락서니건 또는 모르는 누구건 겪어 보면 안다. 절망은 멋이 아니다. 그냥 죽음이다. 그 죽음에서 깨어나면 다른 인간이 되어있는데 아주 더럽다. 강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강인한 인간을 참 더럽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절망하지 않는 내성 같은 건데 순결을 잃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에효….
‘카르미나 부라나’의 거창한 도입부는 이런 대사로 시작한다.
“오, 운명의 여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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