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수길 칼럼

총선, 걷기 그리고 일기 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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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수길
주필

걷자. 투표장까지 걸어서 가자. 동네 초등학교나 동사무소는 걸어서 가기에 딱 좋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봄비에 젖은 길 차분히 밟아서 가고, 날이 활짝 개면 이제 곧 필 개나리·진달래 기대하며 걸어서 가자.

 가면서 눈을 들어 투표장으로 향하는 부모·형·언니·동생·자녀 세대들의 행렬을 보자. 얼마나 나왔는가, 표정들이 어떤가.

 선거 당일에도 결과 예측이 오리무중인 오늘 총선의 최대 변수 중 하나는 ‘세대’다. 전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대 투표’ 양상은 지난해 분당을·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거치며 점점 더 뚜렷해졌다. 이번 총선 분석에서는 ‘세대 균열’ ‘세대 전쟁’이란 표현도 등장했다.

 투표장으로 향하는 세대들의 행렬을 보며 각 세대 나름대로 헤치고 살아온 고단한 세파를 생각해 보자.

 ‘운동권 386’들은 이제 486이 됐다. 40대 후반이 주축인 그들 중 선배들은 이미 50대 초반에 접어들었다. 이들 486의 동생뻘들이 2040의 맏형·맏언니를 자임하는 세대다. 40대 초·중반인 이들은 대학 때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보았고, 사회에 나오며 외환위기 상황에 직면한 첫 청년실업 세대다. 이들보다 더 고단한 다음 세대가 알바와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88만원 세대다. 이들 2040이 오늘 총선의 최대 변수다. 반(反)새누리당·비(非)민주당 성향이 다수라는 조사가 여럿 나와 있기에 “총선 결과는 열어봐야 안다”는 분석 아닌 분석들을 내놓는 것이다.

 이들의 형·언니·부모뻘인 베이비 붐 세대도 고단한 세파를 헤쳐왔기는 마찬가지다. 베이비 붐 세대의 대표 격인 ‘58년 개띠’는 나이 마흔에 외환위기를 겪었고 이제는 한창 그만둘 때이며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기대지 못하는 첫 세대라고 자조한다.

 딱히 어느 세대 잘못이 아니다. 고도 성장기가 지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데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지 못한 탓인데, 나와 다른 저들 세대는 올해 총선·대선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자. 그리고 서로의 세대를 이해하고 헤아려야 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까지도 생각하면서.

 세대와 함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오늘 총선의 최대 변수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한 사회 연결망은 오늘도 어지러이 오가고 시시각각 변하면서 어디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의 에너지와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의 의외성을 다 지켜본 우리 사회는 SNS시대의 밝은 면, 어두운 면을 다 안다. 인터넷과 SNS는 개방·참여·소통의 새 세상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쏠림·폐쇄·소외의 판도라 상자도 열어놓았다. 정당한 약자의 결집을 가능하게 하지만 부당한 소수가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 잘 활용하면 선거·마케팅의 전략적 수단이 되지만, 잘못 당하면 사회·기업이 무너지는 치명적 요인이 된다. 인터넷에 빠지고 SNS 소통에 기댈수록 개인은 고립과 낙오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 자기 성찰의 시간을 못 가진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걷자. 오늘 걷자. 발길이 곧바로 투표장을 향하든, 투표장을 거쳐 더 좋은 곳으로 가든, 아예 다른 곳으로 가든, 오래 많이 걷자. 걷기는 비만을 막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생활 양식이 바뀌면서 심각해진 비만은 이제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를 걷든 돌아오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맘에 드는 노트나 일기장을 한 권 사자. 그리고 오랜만에 일기를 쓰자. 펜을 들고 아날로그로. 자녀 등 가족에게도 권해 보자. 항상 인터넷과 SNS에 연결된 채 소통·쏠림·소외에 희비가 엇갈리는 우리 일상에서 일기 쓰기는 모처럼 자기 자신과 홀로 마주 앉아 나를 성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부모도 자녀도, 나홀로 가정에서도.

 걷기가 성인병을 줄여 가정을 지키고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는 것처럼, 일기 쓰기는 자녀 논술 학원비를 줄이고 부모 세대의 치매를 예방한다. 차마 듣기 어려운 막말도 많이 사라질 것이다. SNS시대의 건강한 사회를 일구기 위한 균형 잡기로 일기 쓰기만큼 손쉬운 방법도 없다.

 걷자. 총선 날 걸으면서 오늘 최대의 변수인 세대와 SNS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돌아와 모처럼 일기를 써 보자. 오늘 총선 날은 그런 일을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투표장으로 향하는 세대들의 행렬에서 보듯 우리 모두는 여기까지 저마다 고단한 삶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김수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