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김승유 회장이 닦아놓은 길 … 난 마무리 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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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2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경영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마무리투수로 나 같은 사람도 괜찮지 않겠나.”

 김정태 신임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28일 첫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김승유 전 회장이 워낙 ‘거목’이어서 내가 (후임자로) 너무 빈약하지 않으냐는 말이 있는 걸 알고 있다”며 꺼낸 얘기다. 김 회장의 말처럼 금융권에선 오랫동안 ‘하나금융=김승유’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김 전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1971년 직원 20여 명으로 출발한 단자회사 한국투자금융을 직원 2만여 명의 거대 금융사로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빈자리를 메우는 게 녹록한 과제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생각만큼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이미 길을 잘 닦아놨기 때문”이란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만들어진 길을 잘 달리는 것”이란 말도 했다. 하나은행장과 하나대투증권 사장 경험을 언급한 뒤 “6년간 최고경영자(CEO)를 했는데도 걱정이 많으신 것 같다”며 농담을 건네는 여유도 보였다.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선 “조직을 인화·단결시켜 한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은 내가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남을 이끄는 ‘리더십’ 못지않게 정해진 방향을 잘 따라가는 ‘팔로어십’이 필요하다”며 “직원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팔로어십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진짜 리더는 남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력적인 사람이 돼 직원이 끌려오게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하나대투증권 사장 시절 사내 체육대회에 각설이 분장을 하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하나은행장이던 올해 1월 2일엔 본점 로비에서 TV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감사합니다’를 패러디해 직원에게 새해 인사를 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영업의 달인’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그는 81년 서울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뒤 대부분을 영업 현장에서 일했다. 초짜 은행원 시절부터 소주를 사들고 아파트 경비원을 찾아다니며 주민의 ‘고급 정보’를 얻어내는 수완을 보였다. 하나은행 지방지역본부장 시절엔 점심은 경상도, 저녁은 전라도에서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국을 내 집처럼 누볐다. 하나금융 계열사의 영업조직이 바짝 긴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친화력’과 ‘영업력’만으론 총자산 업계 2위로 올라선 거대 금융지주를 이끌기엔 부족하다. 냉철한 전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다. 김 회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서 그는 “KB금융은 소매금융, 우리금융은 기업금융, 신한지주는 포트폴리오 구성에 강점이 있다”며 “하나금융은 글로벌 전략으로 치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미국 시장에서 재미동포뿐 아니라 전체 아시아계를 공략하겠다”며 “하나금융이 이미 진출한 중국·인도네시아의 현지인 직원을 미국에 보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했다. 하나금융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인 보험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좋은 기회가 있다면 인수합병(M&A)에 나서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업계에서 M&A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ING생명 아시아·태평양 법인에 대해선 “짝사랑하는 곳이 너무 많아 우리까지 참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김 회장은 간담회를 마친 뒤 기자에게 “지금은 (전임자보다) 더 나은 걸 하려고 하는 것보다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내가 1회부터 다시 던진다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라가면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기업의 2세를 만날 때마다 ‘누구의 아들로 불리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얘기한다”는 말도 했다. “기업의 핵심 역량을 파악해 이를 잘 지키는 것도 창업 못지 않게 어렵다”는 것이다. 김승유 전 회장은 퇴임하면서 30여 년 동안 걸어놨던 액자를 김 회장에게 물려줬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제품 환경은 변화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은 어떤 조직이라도 파괴할 수 있다’는 경구가 적힌 액자다. 1920~40년대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이끌었던 앨프리드 슬로언의 말이다. 김 회장은 “김 전 회장이 닦아놓은 길을 계속 보수해 하나금융을 반드시 글로벌 금융사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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