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기업 투자 의욕 꺾는 국민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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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상사법학회장

6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다음 달 15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회사법(상법)은 혁신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예컨대 “유능한 경영진을 쉽게 영입해 보다 적극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이사의 회사에 대한 책임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미국과 일본의 입법례를 본받아 이사의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 한도를 연봉의 6배(사외이사의 경우는 3배)로 한 것 등이다. 기업들은 이렇게 바뀐 회사법에 맞춰 정관을 변경하는 안건을 주총에 올리려 했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기업이 새로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을 국민연금이 막는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회사법 제400조 제1항에 따르면 이사가 경영상의 과실로 회사에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경우, 주주 전원의 동의로 그 책임을 완전히 면제할 수 있다. 이는 전부터 있던 규정이다. 그러나 ‘모든 주주의 동의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개정 상법은 제400조 제2항을 신설해 이사의 이 같은 무한책임을 일부 감경할 수 있도록 했다. 사내이사의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중 연봉의 6배를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관의 규정으로 면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민연금이 제동을 거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개정 상법 제400조 2항의 내용이 주주 권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으니, 기업들이 이 조항에 근거해 정관을 변경할 경우 주총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답답한 심경이다. 개정법 제400조 제2항은 단서를 달고 있다. 이사의 고의·중과실로 인한 경우와 겸업 금지, 회사기회유용 금지, 자기거래 금지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책임을 감면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런 안전장치를 달아 사실상 가벼운 과실만 이사의 책임을 감면해 주도록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겠다는 게 국민연금이다.

 다른 하나는 재무제표 승인의 문제다. 재무제표는 전문적이고 매우 기술적인 지식과 계산에 기초해 작성하므로 이를 주총에서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런 재무제표를 주총에서 승인하는 것은 그저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개정 상법은 정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재무제표에 대한 외부감사인의 적정의견이 있고, 감사(감사위원회 설치 회사에서는 감사 전원)의 동의를 받은 경우에 한해 재무제표 확정 승인을 이사회에서 결의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이런 회사는 이사회에서 배당을 결정하도록 하고, 그 결정을 주주총회에 보고만 하면 되도록 했다. 이것은 여러 나라의 입법례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주주권 강화에 역행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국민연금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정관 변경에 제동을 걸자, 개정 상법에 맞춰 정관을 바꾸려던 회사들이 이를 자진 철회하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일부 기관투자가의 지나친 우려나 편중된 판단 여하에 따라 회사법의 개정 취지와 그간의 노력이 무색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가뜩이나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 때문에 기업들의 투자 의욕이 꺾이는 판국에 국민연금의 실력행사는 심히 우려스럽다. 국민연금 자체가 공공기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결권을 강하게 행사할 경우 사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로 비칠 수 있다. 이것은 무한 자유경쟁 시대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상사법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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