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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맥주와 벚꽃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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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상복
워싱턴특파원

지난 17일 오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찾은 곳은 워싱턴 시내 한 선술집이었다. 아일랜드 최대 축제일인 ‘성 패트릭스 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일랜드 출신 사장이 운영하는 전통 펍에 들른 것이다. 편안한 점퍼 차림의 오바마는 아일랜드의 명물 기네스 흑맥주를 마시며 함께 축제를 즐겼다. 입술에 맥주 거품을 묻힌 채 건배를 외치는 대통령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그날 워싱턴 일대는 온통 초록색으로 넘쳐났다. 시민들은 남녀노소, 인종을 가릴 것 없이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초록색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선 카 퍼레이드와 아일랜드 댄스 공연이 펼쳐졌고, 건물들은 초록색 리본과 네 잎 클로버로 장식됐다. 펍에 모여 기네스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인해 워싱턴 일대에선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음주 단속이 벌어졌다. 분위기에 빠진 기자 역시 기네스 맥주를 한 박스 구입했으니, 이날 하루만큼은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가 미국을 점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 페트릭스 데이’가 끝난 지 일주일도 안 돼 이번엔 일본 문화가 워싱턴을 점유했다. 해마다 3월 말~4월 초에 열리는 벚꽃축제가 화려하게 개막한 것이다. 벚꽃세상으로 변한 포토맥강 주변의 장관을 보기 위해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워싱턴을 찾는다. 올해는 일본에서 벚꽃이 들어온 지 100년을 맞는 해여서 더욱 풍성한 이벤트가 준비돼 있다. 시내 박물관에선 ‘벚꽃과 일본’ 같은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기념우표와 사진집도 나왔다. 여행사들은 일본 여행 할인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다음 달엔 일본 문화를 한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길거리 축제가 워싱턴 곳곳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기자가 축제 현장을 방문했을 때 후지사키 이치로 주미 일본대사는 가방에서 한 움큼씩 고무 팔찌를 꺼내 관광객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팔찌엔 ‘미국과 일본의 우정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하는 행사”라며 “미국 전역에 벚꽃 문화를 전파하는 게 다음 목표”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두 축제를 겪으며 기자가 피부로 느낀 건 ‘문화 침투’의 힘이었다. 이들은 자국의 고유한 문화를 단순히 소개하거나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문화 자산이라면 우리도 남들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최근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잠재력은 눈이 부시다. 그러나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각 나라의 생활 속까지 녹아들었는지는 의문이다. 드라마를 판매하는 데만 몰두해 일부 동남아 국가에서 혐한(嫌韓) 반응까지 일어났다거나, K-팝 공연이 남발돼 전반적인 공연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소식들은 그래서 더 씁쓸하다. 문화 수출을 상업적인 각도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문화 외교’의 측면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혜가 절실해 보인다.